Saturday, December 22, 2012

언니의 영주권 오디세이

언니 영주권 챙겨와.” 
언니와 형부 그리고 우리 부부는 차를 몰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천 섬을 돌고 캐나다로 가서 갓 받은 따끈따끈한 언니와 형부의 영주권 효능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다.

천 섬을 구경하고 다리를 건너 캐나다로 들어가려고 접경지역에서 얼쩡거리다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약간의 걱정을 동반한 심정으로 영주권을 보여주니 즐거운 여행 잘하라.’며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이 영주권을 받으려고 그리도 애타게 기다렸던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언니는 딸을 통해서 영주권을 받았다. 언니 딸, 내 조카는 나와는 반대로 여자 키 치고는 큰 편이다. 친정아버지 왈 나는 키가 작아서, 조카는 키가 커서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쉽지 않으니 떠나는 것이 낫겠다.’는 견해 또한 우리 둘이 한국을 떠난 작은 이유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6.25전쟁을 혹독히 겪은 친정엄마는 늘 전쟁이 나면 딸들이 군인들에 의해 망가지기 십상이고 딸들도 공부를 많이 시켜야 한다며 유학을 권장했다. 친정아버지 또한 사람은 넓은 세상을 둘러봐야 인간이 된다는 신조인지라 자식들의 결점을 유학 보내는 것으로 치유하려 했다.

조카는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유학 왔다. 공부도 공부지만 결혼도 해야 하는데 뉴욕에서 결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키 크고 인물은 좋은데 애교가 없어서인지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조카의 모습이란 방안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보릿자루같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남자를 소개받았지만, 반응이 없는 조카가 애를 태웠다. 부모가 미국에 없다는 것이 결혼 조건의 단점 중의 하나였기에 언니와 형부는 방문 비자로 미국에 왔다.

세 번째 소개받은 남자를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조카를 더 만나 볼 것을 강요했다. 남자 쪽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왔다. 조카도 서너 번을 더 만나더니 마음을 주는 듯했다.

어릴 때 이민 온 조카사위와 다 커서 유학 온 조카는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맞을 리 없겠다는 불안한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조카사위가 성실하고 조카 또한 나무랄 것이 없는지라 둘은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산다.

조카를 결혼시키느라 애쓰는 사이에 언니와 형부는 불법 체류자가 되었다. 난 조카에게 빨리 시민권을 받아 부모에게 영주권 해 줄 것을 또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조카사위가 서둘러 언니 부부도 영주권을 받았다.

조카를 결혼시키고 언니가 영주권을 손에 쥘 때까지의 그 오랜 세월을 되돌아보니 어찌 그리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는지. 한끝의 오차만 있었어도 언니는 불법으로, 조카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방구석에 우두커니들 있을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Friday, December 21, 2012

Sister's green card Odyssey

"Get your green card," my sister’s couple and our couple drove up north. I wanted to go around Thousand Islands and to go Canada and check the efficacy of my sister and brother-in-law's green card.

After visiting Thousand Islands, we were questioned by a police officer while loitering around the border area to into Canada. With a little anxiety, we showed the green card. The police officer said, "Good luck on your trip." The long years of waiting for this green card passed like a revolving lantern in my head.

My sister’s couple got a green card through her daughter. My niece, on the contrary to me is tall for a woman's height. My biological father said, 'because I'm short, my niece is too tall not easy to get married in Korea, so you'd rather leave.' There was one of the small reasons why we both left Korea.

My mother, who had suffered severely in the Korean War, encouraged me to study abroad, saying that soldiers often destroy daughters and that daughters have to study a lot. My father also tried to heal his children's shortcomings by sending them to study abroad because he believed that people could become good human only by looking around the wide world.

My niece graduated from college and came to New York to study. But getting married is not easy in New York. She is tall figure and good, but she did not have a love affair because doesn't have charms. Her appearance was like a sack of barley stuck in the room.

I introduced men to her. But my unresponsive nephew fretted me. One of the disadvantages of marriage was that her parents were not in the United States. I made her parents come by a visiting visa.

I compelled her to meet the third man who came out aggressively. She seemed to give her heart to him after meeting him three or four more times.

The man who was immigrated when he was a child cannot be fit with my niece who came to study abroad because they grew up in a different culture was not without the element of anxiety. However they got married and live happily have a son and daughter.

While trying to get my niece married, my sister's couple became illegal aliens. I was forced to my niece to get citizenship quickly and force her parents to make them permanent residency. Fortunately, the niece's husband rushed to do paper works and my sister's couples got the green card.

Looking back at those long years until my niece got married and my sister's couples got a green card, I wondered how things went so quickly. Even if there was only one error, it makes me dizzy to think that my sister is illegal, and my niece would be in the corner of the room like a sack of barley.

Saturday, December 1, 2012

그리운 사람

검은 가죽옷에 래그워머을 신은 키에 꾸부정히 걸어가는 사람을 봤다. ‘아 선배님이 지나가네. 차 세워요.’ 하려다 아차 싶었다.

우리는 그 선배님을 정 박사라고 불렀다. 박사학위는 없지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아는 것이 많아서다. 본인 말로는 주간지를 열심히 읽은 덕분이라며 정 박사라고 불러 주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 놀러 와.” 
어제 놀았는데 또 놀아요?” 
주중에 노는 거 하고 주말에 노는 게 같냐?” 
매일 노는 사람도 주말은 더 재미있게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3년간 살다 헤어진 부인과 이혼하러 갔던 이야기를 수십 번도 더 들었
이혼하려고 기다리는데, 앞에 서서 기다리던 부부가 싸우는 거야. , 이혼하러 와서까지도 싸우는 사람이 있더라.” 
남의 이혼 이야기엔 신이 나서 목소리가 커졌다.
이혼선서를 하고 나와 마지막으로 정말 다정히 헤어지려고 했는데 이게 싹 돌아서더니 오는 택시를 잡아타고 쏜살같이 가버리리는 거야. 아직도 달려가는 택시 뒷모습이 눈에 선해.” 
자신의 이혼 이야기엔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는 시청에서 우리 결혼식 증인 중의 한 명이었다. 온종일 짧은 주례 겸 선서식을 앵무새처럼 주관하는 퇴역 대령은 우리 일행이 영어를 못하는 줄 알고 그나마 대충하던 것을 더욱 짧게 끝냈다. 그 바람에 사진 찍을 틈이 없었다고 다시 하라며 그가 떼를 쓰기도 했었는데.

야 이혼 한 사람이 주례를 서면 이혼한다는데 괜찮겠지?” 
걱정 섞인 신 나는 표정으로 내 동생 결혼식 주례를 섰다. 결국, 내 동생은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 갈 곳이 없던 우리는, 주말이나 연휴 그리고 명절엔 정 선배를 찾아가곤 했다. 
인제 그만하고 일어납시다.” 
선배님 건강을 생각해서 술 마시다 한마디 하면 버럭 화를 내며 
놀 줄도 모르는 놈, 내가 너희보다 더 오래 살 거야. 가. 짜식아.”
오래 산다더니그는 췌장암으로 요절했다. 오늘 같은 명절엔 피 붓 치인 양 항상 함께했던 그에게서 
야 김치 있니?” 
하는 전화가 걸려 올 것 같다
하늘나라에서도 정 선배와 이 선배( 정 선배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가신 다른 선배 )가 만나서 술 마시고 있겠지?” 
뻔하지. 두 분이 살아계시면 함께 한잔할 텐데.” 
술맛이 예전만 못하다

Friday, November 30, 2012

A person who misses

I saw a tall man walking with a black leather jacket and in leg warmers. "Ah, senior pass by. Stop the car."

We called him Dr. Chung. He doesn't have a Ph.D. degree, but he knows a lot of things because he has traveled around and met many people. He said he knew a lot thanks to his hard work reading the weekly magazine. He loved to be called 'Dr. Jung.'

"Hey, come play." "We played yesterday, but are we playing again?" “Is it the same to play on the week and to play on the weekend?” Even the people who played every day they wanted to have more fun on weekends.

I've heard dozens more times about his wife, who was divorced after living for three years. "I'm waiting to get a divorce, and the couple who stood in front of me and waited for they were fighting. Hey, there's someone fighting even when they're here for a divorce." About the story of another's divorce raised his voice excitedly.

“I took the oath of divorce and tried to break up nicely with her for the last time. But she turned around and took a taxi and went off like a shot. I still remembered the back of the taxi running. In his divorce story, his voice became smaller.

He was one of our wedding witnesses at City Hall. The retired colonel, who parrots the short weekly and ordination ceremony all day long, thought our party was poor at English and finished the roughing-up short. He even begged the retired colonel to repeat because we didn't have time to take pictures.

"Hey, you don't mind if a divorce person does an officiated. Someone who's been officiated is getting divorced. Will it be all right?" He officiated at my sister's wedding with a worried look on his face. After all, my sister got divorce.

Having no place to go during the hard times, we used to visit Jeong on weekends and holidays. "Let's stop now and get up. Let's think about our health and drink." If I said such things he used to get angry and said, “You don't know how to play, I'll live longer than you. Go. Fuck you."

You said you lived a longer than me. He died prematurely of pancreatic cancer. On a holiday like today, It seems that a welcome call will come from him, "Hey, do you have kimchi?"

"Is Jung and Lee in heaven meeting and drinking?" "I'm sure they'll have a drink together." The wine is not as good as it used to be.

Saturday, November 17, 2012

친구의 분노

맨해튼 첼시로 가는 길 트래픽이 몹시 심했다. 서울에 사는 동기 동창이 뉴욕 화랑 밀집 지역인 첼시에서 개인전을 했다. 드디어 한국에서 잘 나가는 작가 라더니 뉴욕까지 왔구나! 가난한 화가도 성공해서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며 자랑스러웠.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밀려든 관람객에 둘러여 있는 동기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훤하게 변해 있었다.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대학 시절로 되돌아갔다.

미술 대학에서의 남학생들은 여학생들과는 달리 가난했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그는 더욱 가난했다. 그가 등록금 낼 때면 다른 남학생들이 내일처럼 걱정과 수심에 차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학교 실기실에서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갈 곳이 없어서였다.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불렀다. 그렇게 말이 없고 우울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던 그가 어찌나 웃기는지 우리는 밤새도록 떠들었다
, 있잖아. 
기억력을 더듬으면서
걔 있잖아
를 연발하며 학창시절로 돌아갔다. 우리 동기들이 다 아는 그의 절절한 사연, 이루지 못한 옛사랑 이야기가 결국엔 술기운에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는 우리 일 년 후배와 오랫동안 사귀었다. 그러나 가난한 화가라는 이유로 그녀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딸과 같은 공부를 했던 그를 비하하는 모습에 얼마나 허탈했을까? 결국, 그녀는 온 집안의 반대를 극복 못 하고 돈 많은 남자를 선택했다.

결혼식장에 찾아간 그는 양팔을 잡아 끌어내는 그녀의 형부들에 의해 쫓겨났고 그녀는 결혼하고 외국으로 떠났다. 그 상처로 젊은 나날을 괴로움 속에서 보냈다. 오래된 일이지만 그의 가슴에 맺힌 한을 들으며 모두가 조용해졌다.

허나 인생길이 그리 순탄하기만 할까. 그녀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와 그가 성공한 화가로 이름이 알려지자 전시회에 나타나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는 그에게 전화해서 만나자는 것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절했다는 이야기다.

가난하고 희망이 없었던 화가를 믿고 결혼해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부인에게 도리가 아니라서 만나지 않았단다. 이루지 못한 옛사랑을 말한다기보다는 가난해서 받았던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은 것에 대한 분노를 말하고 있었다.

너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실수 한 거야. 복을 찬 거야. 
우리는 합창으로 위로 아닌 위로를 했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결혼을 반대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느냐니까? 
친구는 술에 취해 가슴에 맺힌 한을 토했.

Friday, November 16, 2012

The anger of friend's

Traffic was heavy on the way to Chelsea in Manhattan. A classmate who lives in Seoul held a solo exhibition In the gallery-rich area of Chelsea, New York. He is a popular artist in Korea. Finally he came all the way to New York! I was proud that even the poor artist could succeed and live well. I was impatient to see him soon.

The friend who surrounded by crowds had turned unrecognizable wonderful. Looking at him from afar, I went back to my college days.

Boys at art colleges were poor unlike girls. Especially from the countryside, he was even poorer. When it's time for him to pay his tuition, other boys were as worried and pensive as if their situation. Even after class, he sat in the classroom with a serious face. He wasn't drawing, he didn't have any money to go out to have fun.

I called him home because I wanted to talk more with him. How funny he was who used to be so silent and depressed. We talked all night. "Hey, you know him." Stuttering our memory, we went back to our school days with a series of "you know him or her." The story of his unfulfilled past love, which all our classmate knows, finally popped up into the air of drink.

He dated our junior for a long time. But she faced stiff opposition from her parents for being a poor artist. Eventually, she couldn't overcome the opposition of the whole family and chose a rich man.

He went her wedding, but her brothers who grabbed his both arms kicked him out. She got married and left for a foreign country. The wound left his young days in agony. It's been a long time, but everyone has been quiet with the story of his grief.

But is the path to life so smooth? She quietly returned to Korea after her husband failed in business. And she showed up at his exhibitions when his name became known as a successful artist. Not long ago, she called him and asked him to meet her, but he refused with a mixture of irritable voices.

Because it's no good for his wife who believed and married the poor and hopeless artist made him now what he is. Rather than talking about the unfulfilled love of old, he was expressing anger at the old wounds he had received for his poverty.

"It's a big mistake not to choose you. It's a blessing for you." We comforted in chorus. "Under any circumstances, we should not oppose the marriage of our children. Okay. You get it. Do you understand me?" My friend threw up his grudge in drink.

Saturday, November 10, 2012

당신은 특별한가요?

벌써 비행기가 착륙한 건 아니겠지?’ 조바심이 나 주차를 하고 오겠다는 남편을 뒤로하고 부리나케 터미널 1,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 도착지로 뛰어갔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옆에 있는 한국 여자가 손을 들어 양복 입고 나오는 남자를 반기길래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가 도착했느냐고 물었다
우리 남편은 일등석을 타고 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얼떨결에 ! 일등석, 그렇지 일등석은 일반석보다 빨리 날지.’ 남편과 팔짱을 끼고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며 아차 싶었다. 같은 비행기잖아!

젊은 혈기에 세상을 둘러보겠다고 집 떠난 아이는 온몸이 햇볕에 그을린 동남아시안 모습으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뒤늦게 나왔다. 편하냐 불편하냐의 차이지 일등석이나 일반석이나 같은 속도로 나르지 않는가!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 급하게 서울 가는 비행기 표를 구해 공항에 갔다. 항공권을 스크린하고 탑승하러 가는 긴 통로를 지나다 먼 친척을 만날 줄이야. 매우 반가웠다.
서울 가세요? 잘됐네요. 긴 여행 이야기하면서 가면.” 
전 일등칸을 타는데요.” 
아 그러세요.” 
알래스카에서 내려서 이야기해요. 그럼 이만.”
왼쪽 일등석 통로로 들어갔다. 나는 오른쪽 일반석으로 들어가며 
기다릴게요.”
나는 알래스카 공항에 잠깐 쉬었다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맸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먼 친척으로 한국에서 어렵게 살다 꿈의 나라 미국에 와서 자영업을 열심히 일궈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다. 가족모임에서 서너 번 만났다. 만날 때마다 약간 비하하는 말투로 
아직 그곳에 사세요?”
가 그녀의 인사다오래전 그녀는 난방도 없는 나의 브루클린 스튜디오에 왔었다. 그때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놀랐는지 그녀의 기억엔 내가 항상 추운 스튜디오에서 떨고 있는 모습으로 각인된 듯하다.

미국의 시작은 루저들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고국을 떠날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의 모자람을 채워보려는, 한마디로 잘 살아보겠다는 각오로 떠났다. 그런데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지난날의 어려움을 되돌아볼 틈도 없이 그동안 쌓인 천박한 싸구려 선민의식을 곳곳에 내뱉는다.

나 또한 남들 앞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알량한 행동과 말들이 여러 사람의 가슴을 후비고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남들이 나에게 퍼붓는 우쭐거림은 그리 화낼만한 일은 아닌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