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7, 2018

추억의 상호

나는 몇 번이나 오랜 친구의 이름인 양, 구화, 삼복, 동보, 울월스란 상호를 되새김질하며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트레이드 조(Trade Joe’s) 93가 콜럼버스 애뷰느에 곧 새로 오픈할 예정이다. 이따금 지나다니며 공사가 얼마나 진척됐나를 들여다볼 정도로 기대된다. 한아름 마켓도 110 가와 브로드웨이에 오픈했다. 한인 마트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는데 덤으로 생겼다. 두 슈퍼마켓 모두 내가 걷는 산책 반경 안에 있어서 두루두루 식품조달이 쉬워졌다.

옛날에 나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학생 기숙사에 살며 학교 구내식당에서 세끼를 해결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이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해 더욱 말라 비틀어져 그 당시 내 몸무게가 90파운드나 됐을까? 서울 그리고 한인과 완벽하게 차단된 시간이었다.

물 건너 산 넘어 기차를 타고 찾아간 곳이 플러싱에 있는 구화 식품이었다. 동보식품에서 나온 무말랭이 무침과 고추장 그리고 쌀을 샀다. 김치는 냄새날까 봐 들었다 놓기를 서너 번 아쉽게 놓고 나왔다. 울월스에서 산 냄비에 밥을 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쌀밥과 무말랭이를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며 밥 먹다 말고 흐느꼈다. 미국 온 지 반년만이다.

외로움은 병이었다. 그러나 더 급했던 것은 원래 짧은 입맛에 제대로 먹지를 못 하는 것이었다. 맨해튼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리고 남자도 만났다. 그도 무척 말랐다. 역시 섭생이 부실함에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몹시 추운 눈 오는 날, 미드타운에 있었던 삼복식품에서 김치를 샀다. 한번 가 봤던 그 남자의 그랜드 스트릿에 있는 건물 앞, 하수구 뚜껑에서 김이 뿌옇게 올라오던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갔다. 김치를 주려고. 그런데 눈 덮인 코블 블록 위 하수구 뚜껑마다 여기저기서 김이 나왔으니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허드슨 벨리에서 부는 매서운 바람은 브로드웨이 빌딩 사이를 지나면서 가속력이라도 붙는지 그 삭풍 속을 헤집고 다니다 감기에 걸려 돌아와 앓았다. 그 당시는 김치를 그야말로 금치라고 불렀을 정도로 귀했으니 그의 마음을 얻을 만했다.

지금은 구화식품도 삼복식품도 사라졌다. 몇 년 전에 동보식품 마크가 새겨진 고추장을 보고 너무 반가워 산적이 있지만, 예전과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찾고자 하는 것 뭐든지 살 수 있었던 여기저기 뿌려 놓은 듯 그 많던 울월스(Woolworth)도 다운타운에 화려한 빌딩만 남기고 사라졌다.

내 기억에 애틋하게 남아 그리움으로 되살아나는 구화, 삼복, 동보, 울월스는 나의 기억을 리와인드 한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속에 잠기듯 또 다른 기억으로, 빛바랜 벽지 무늬 한 귀퉁이를 무심히 바라보던 시선이 슬며시 옆 무늬로 이동하듯 오랜 시간 이어진다. 씁쓸하게….

Saturday, March 24, 2018

꼭꼭 숨어라

거길 왜 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큰소리치더니 아무래도 머리를 내밀어야 할 것 같아.”라고 남편은 말을 바꾼다. 그의 변덕에 기가 차서 째려보니, “한국 남자들의 오랜 습관이잖아.”

내가 모르는 단어 뜻을 물어보면 남편은 조용하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빨리 대답해. 아는 척하지 말고으레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한국 남자들이 원래 다 그렇잖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툭하면 성질을 부리며 짜증은 왜 내는데?” 이번에는 그 한국 남자 타령은 어디 가고 집안 내력이 워낙에라고 말머리를 돌리며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머머! 자기 총각 시절 룸메이트, 집세 떼어먹고 연극 한다고 거들먹거리던 사람 성추행으로 기사 떴어.” “내 그럴 줄 알았지. 조선 500년간 놀고먹는 양반계급이 어둑어둑해지면 기생집을 찾던 버릇이 아직 남아서.” 전해 내려오는 관행이니까 비껴가도 된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하다 갑자기 열을 내며 마누라 요즈음 입이 왜 이리 거칠어졌어?” “성추행, 성폭행 사건 때문에 성질이 치밀어 오르니까. 그렇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한국 옛 아낙네들이 해왔던 것은 지켜야 한다며 주장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참고 살아야 쿨한 여자란다. 남편이 바람나서 집 나갔다가 골골해져 지팡이 짚고 돌아오면 받아줘야 덕 있는 여자라니. 조신하게 남편 말에 귀 기울이고 내조 잘해야 집안이 잘된다질 않나. 종일 일 하고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 밥상 차려 받치지 않으면 삐치는 인간이 한국 남자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많지만.

별 볼 일 없는 권력 나부랭이를 휘두르며 지저분하고 구차한 성추행과 폭언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익스큐즈 할 일이란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한국여자 골프 선수들의 통쾌한 휘갈김이 어쩌면 그 못난 남성들에게 억압받으며 살아온 여인들의 한풀이가 아닐까?. 근사하게 승화된 스포츠로 복수하는. 하얀 골프공처럼 난타당하지 않으려면 한국 남자들 이젠 바뀌어야 한다.

요즈음 Me too 캠페인으로 저질 관행에 충실했던 그들이 조용히 처박혀 떨고 있겠지. 잠수타고 있다 잠잠해 지면 슬그머니 수면으로 떠 오를 시기를 기다리며.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Saturday, March 10, 2018

타향살이


내가 집과 가족을 떠났을 때
난 그저 아이에 불과했지.
낯선 사람들 틈에서
적막한 기차역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
몸을 웅크리고, 가난한 동네를 찾아다녔어.’

이것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 1969년 히트송권투선수의 가사다. 내가 사춘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그 당시는 가사 내용도 제대로 몰랐다. 빠른 리듬 속에서 폭죽 터지듯 나오는 슬픔, 깊은 수면에서 몽글몽글 떠오르는 슬픈 곡조가 무작정 좋았다. 다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종이에 ‘The Boxer’라고 적어 신청하곤 했다. 탁자에 턱을 괴고 라일라 라이, 라이 라라라’.

막 노동꾼 임금만 달라면서
일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날 쓰려고 하지 않았어.’

몇십 년이 지나서야 가사의 내용을 자세히 음미하면서 들어봤다. 힘들고 고달픈 우리들의 타향살이와 진배없는 애절한 하소연이다. 그리고 내 이야기다. 철없던 시절 사람들 말만 믿고 예술의 도시 뉴욕에 덜컹 혼자 왔다. 유학자금이 거덜 날까 봐 싼 곳을 찾아 헤맸다.

겨울옷들을 늘어놓으며
떠나기를 바랐어.
고향으로.
뉴욕시의 겨울이 내 살을 에지 않는 곳으로

낡은 외투 속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직장을 찾아 헤맸다. 살을 에는 뉴욕의 혹독함이 견디기 힘들어서 짐을 쌌다가는 풀기를 여러 번.  
  
빈터에 권투 선수가 서 있어.
글러브가 남긴 상처가 남아있어
분노와 수치심으로
난 떠나요. 난 떠난다고요.’
그러나 권투 선수는 여전히 남아있죠.’

온갖 수모와 상처를 받았다. 권투선수처럼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뉴욕을 떠나지 못하고 허탈하게 앉아 여전히 라일라 라이, 라이 라라라’.

이민 살이 리허설 곡이었던 이 노래를 왜 그리도 좋아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Saturday, February 24, 2018

기생충 같은

늘어져 지내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전투준비 태세를 갖춘다.

작년 11월 말, 오바마 건강보험을 갱신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12월 말이 되었는데도 청구서가 오지 않았다. 보험회사로 전화하면 뉴욕 스테이트의 문제다. 뉴욕 스테이트에 걸면 보험회사 빌링시스템이 문제라니.

이리저리 아무리 쑤셔대며 해결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행여나 한국 에이전시와 상의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갔다. 우선 빌을 내면 다 알아서 해 준다기에 믿었다. 그리고 돈을 냈다. 그러나 보험은 작동되지 않았다.

도와준다던 그녀에게 전화했다. ‘언니, 지금 손님이 있어서 10분 후에 전화할게요.’ 사냥한 목소리로 끊는다. 연락이 없다. 다시 전화했다. ‘언니, 꼭 전화할게요.’ 이러기를 서너 번, 연락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언니, 언니.’ 하며 친한 척할 때 눈치챘어야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언니, 오빠 하며 접근하면 조심하라던 친정아버지 말씀을 깜박 잊었다. ‘한인끼리 아무렴.’ 하고 믿었던 것도 잘못이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살아가면서 예상하지 못한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꼈다.

분주히 여기저기 다니고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2월 초순에 잘못된 액수의 청구서를 받았다. 생각 같아서는 오바마 건강보험을 집어치우고 싶다. 그러나 보험이 없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보험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며 살 수는 없다. 미국 건강보험 시스템 그리고 벌금을 미끼로 옭아매며 해마다 가격을 올리는 보험회사들의 횡포, 신용 없는 에이전시들과의 상호작용으로 허탈해졌다.

영어가 부족한 나이 든 동양인을 대상으로 접근하는 변호사 꾐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이민 생활에서 겪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동원해 남편과 함께 전투하는 자세로 변호사에게 맞섰다. 후퇴하고 돌격하기를 3개월간, 드디어는 힘없는 동양인을 우습게 여겼던 변호사가 제 꾀에 자기가 빠져 나자빠졌던 경험이 있다.

변호사와의 전투에 비교하면, 이 정도의 일은 별일 아니다.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인간관계 때문인 환멸과 허탈감이 주는 혼란으로 뒷골이 잠시 당길 뿐.

올해 들어 가장 기뻤던 뉴스는 아마존과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 그리고 JP 모건 체이스가 저렴한 건강보험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회사를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워런 버핏은 치솟는 건강보험은 마치 미국 경제의 배고픈 기생충과 같다.”고 지적했다

기생충들과 상대하지 않을 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Saturday, February 10, 2018

빨간 고추와 허브차

일찍 일어나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이 금세 어둑어둑해진다. 눈이 침침해 붓을 놓는다. 낮이 짧은 으스스한 겨울엔 정말 살맛이 나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부산을 떤다. 커다란 솥에 멸치, 다시마, 양파 그리고 빨간 고추를 넣고 끓인다. 남편 말마따나 우리 집 홈메이드 여물이다. 끓인 국물을 병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하고 국수도 말아먹고 된장국 그리고 미역국, 만둣국도 끓인다.

빨간 고추가 들어가면 매콤해지며 국물 맛도 살아난다. 지난가을에 직접 농사를 지었다며 뉴저지 교외 울창한 숲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어느 독자가 줬다. ~ 펴서 말리라면서. 스튜디오에 펴서 말리다 썩기라도 하면 귀한 고추를 망칠까 봐 가져오자마자 냉동칸에 넣었다. 잘게 썰어 음식에 넣으면 빨강 꽃이 피는 듯 곱다. 멀리서 가져다준 독자에게 넙죽 받기만 하고 보답하지 않아 미안하다. 그리고 늘 고맙다.

이웃 채소 가게 주인은 본인가게 채소를 먹지 않고 뒤뜰에 직접 키워 먹는단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농사를 짓고 싶다. 그러나 땅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누군가 직접 키운 것을 주면 신줏단지 모시듯 한 잎도 낭비하지 않는다.

국물을 작은 불로 해 놓고 허브 티와 책을 들고 욕실로 간다.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냉동칸에 넣어둔 쑥을 한 움큼 넣고 발을 담근 채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허브는 작년 가을 수십 종의 허브 농사를 짓는 뉴저지 친구에게 추수할 때 얻어왔다. 그리고 말려 보관해 놓은 것이다. 하루에 한 번 타서 계속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신다. 각종의 허브가 몸 어디에 좋다고 자상하게 설명해 준 친구 남편 말을 되새기며. ‘만병통치라는 그 차를 마셔서인지 몸이 늘어지다가도 기운이 난다. 허브 농사뿐만 아니라 재봉틀도 잘하는 친구 남편이 여러 명에게 만들어 나눠 준 스카프를 목에 두르면 그 넉넉함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열쇠 따는 달카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누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이 신발을 벗고 코를 벌름거리며 저녁거리로 무엇이 나올까? 기대하는 모습으로 들어온다. 싸구려 와인을 곁들인 밥상에 앉아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며 긴긴 겨울밤을 무탈하게 지내고 봄이 빨리 오기를 바랄 수밖에!

유난히 춥던 올해 초, 빌딩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허드슨강 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가던 허연 얼음장도 녹아 보이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만나 수다 떠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어둡고 지루한 겨울을 밀고 당기며 몰아내면 따스한 봄이 성큼 다가오겠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보자.

Saturday, January 27, 2018

쓰잘데없는 생각이 자꾸

해부하기 위해 네다리를 핀으로 고정해 놓은 개구리가 허연 배를 불룩거리면서 몸체를 바둥거렸다. 눈을 가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향한 생물 선생님의 질책에 복도로 쫓겨났다. 교실 안을 기웃거리며 불안에 떨던 나는 생물 수업에 흥미를 잃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세상도 모르는데 지구 멀리 떨어진 우주를 공부한다는 것이 뿌연 안갯속을 헤매는 듯 확실치 않아 물리 시간도 꺼렸다. 파가 바뀔 적마다 반대파를 모조리 도륙 내는 당파싸움의 연속인 역사 시간은 질색이었다. 요즘도 이어지는 반대파 싸잡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로 시작한 성경 시간은 아예 멀리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 불안해하는 꿈을 꿀 정도로 수학은 내가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었다. 암기 능력이 없던 내가 외국어 시간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러나 책 읽기를 즐겨 한번 붙들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국어 시간만은 늘 기다려지곤 했다.

음악 시간도 좋아했다. 불행히도 시원찮은 목소리를 대신해서 피아노 렛슨을 일 년 넘게 받았지만, 악보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하늘로 뻗은 손가락에 긴장을 풀라며 손등을 툭툭 치던 음악선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기하기를 권했다.

생각다 못한 아버지는 미술 선생을 찾아갔다. ‘딱히 소질이 있다기보다는 내 그림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는 선생 말에 렛슨을 시작했다. 친구들과 경복궁의 향원정을 그리려고 자리 잡는 나에게 선생님은 고궁 화장실을 가리켰다.  밝고 화사한 공간만 고집하지 말고 어둑하고 눅눅한 분위기를 화면에 넣어보라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아버지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미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여학교 졸업이나 했을지 모르겠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학교는 열심히 다녔다. 채플 시간엔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 그늘에 누워 소곤소곤 수다 떨다 혼났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어둑해질 때까지 십자가 놀이를 즐겼다. 십자 안에 있는 나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친구에게 맞서 버티다 교복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교복 팔을 휘두르며 깔깔거리고 떡볶이집으로 달려가곤 했으니.

특히나 생물 선생님이 정자와 난자를 설명하던 수업 중, 내 짝이 갑자기 선생님, 정자와 난자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하는 질문에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지.’ ‘그것도 몰라.’하는 투의 엉뚱한 나의 대답에 모두가 발을 구르며 배꼽을 잡고 웃던 수업시간만큼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불필요한 기억은 줄이라는데 옛일이 어제 일보다 더 선명히 꼬리를 물고 자꾸 떠오른다. 쓰잘데없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도 저물었다.

Saturday, January 13, 2018

울 코트

갑자기 불어닥친 추위에 입고 갈만한 두텁고 따뜻한 코트가 없는 남편은 그래도 가야지.’하며 친정아버지가 입다 준 검정 코트를 걸쳤다.

부고장을 받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좋아하는 선배님 부인의 장례식을 장지에 모여 간소하게 치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매서운 날씨에 차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웅크리고 앉아 백미러를 들여다보며 두리번거렸다. 영구차 손님 석에 훤칠하고 잘 생긴 선배님이 회색 울 코트를 입고 앉아 엷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주변에 모인 조객들도 야릇한 미소로 답례했다. 누군가는 어 웃어!’ 하는 분도 있었다. 남자들은 마누라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고 했던가!

주변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깔끔하게 구성된 언덕 위 장지를 향해 부는 거센 바람이 불었다. 모두가 웅크리고 관 주위에 둘러섰다. 고인이 원했다는 자연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관 위에 하얀 백합 한 송이씩을 얹으며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는 애도의 시를 낭송하는 간략하나 품위 있는 장례식이었다.

여느 이민사회의 장례식과는 달리 흰 봉투도 없었다. 게다가 장지에 온 모든 분에게 점심을 대접하기 위해 가까운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강추위에 떨다 갑자기 따뜻한 벽난로 가에 옹기종기 모여 와인을 들이키자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특히나 얇은 코트를 입고 떨던 남편은 이렇게 따듯하고 포근할 수가!’ 하는 조객들에게 베푼 감사의 표정이 역력했다.

장지에서 추위에 떨던 남편 모습이 되살아나 그럴싸한 울 코트 하나 사 주려고 남자 매장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좀처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포근하면서도 오래 입은 옷처럼 작은 키에 어울리는, 까다롭기까지 한 남편 마음에 드는 울 코트가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라도 할는지? 포기하기를 여러 번.

가난한 어린 시절 명절에 엄마가 오랫동안 입으라고 사준 커다란 옷과 신발에 대한 침울한 기억 탓인지 남편의 패션은 엄청 까다롭다. 그냥 이것저것 입다 보면 맞는 스타일을 찾게 되어 자연스럽게 멋을 낼 수 있을 텐데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되고. 발품 팔아 사다 주면 입지 않고 처박아 두니 아예 울 코트는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코트 어때? 입어 봐. 싫으면 당장 리턴하게.” 쇼핑도 싫어하고 내가 사 온 옷도 입어보라면 나중에하던 평소와는 달리 눈이 번득이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걸친다. “맘에 들어. 좋아.” “정말? 한 번 더 입어봐.” “세상에 태어나 처음 입어보는 울 코트야.”라는 게 아닌가! 측은지심에 눈물이 고인다.

모양은 둘째치고 따듯한 옷을 입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김장 끝내고 월동 준비하고 난 듯 마음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