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18, 2015

이민초청

마음 한구석에 너는 한 많은 어리로 자리 잡고 틀어 앉아 이따금씩 뭉클 올라오며 나를 슬프게 한다.

너는 가난한 집의 여자로 태어나 중학교 시험에 떨어지자 2차 시험 볼 기회를 주지 않은 너의 모진 엄마의 권유로 동대문 바느질 공장으로 끌려갔다. 실밥 뜯다 손재주가 뛰어나 기술자가 되어 가족을 부양했다. 70년대 초 미군 결혼해 LA 근교에 자리 잡은 네 시누이가 바느질 잘하는 너를 데려오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네 남편은 중매결혼을 서둘렀고 너는 미국으로 보내졌다.

너와 나는 사촌지간(이모 ) 게다가 같은 동년배어린 시절 함께 했다는 정으로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나에게 항공권을 보내와 뉴욕에서 너를 만나러 LA 갓난아이 둘을 품에 안고 허구한 날 방 한 귀퉁이에서 재봉질만 하다 밥때가 되면 늙은 시부모를 공양하느라 마중 나온 수면 부족인 너의 혈색은 누렇게 떴고 병색이 돌았다. 그나마 착한 너의 남편도 실밥 묻은 홈드레스를 입은 초라한 너의 모습이 창피한지 외면하며 남 보듯 했다.

시부모는 너를 부리듯 부리면서 미국에 데려왔다는 텃세가 대단했다. 너는 아이의 엄마이기 이전에 노예처럼 버는 기계였다. 내가 들으라는 듯 가난한 친정으로 돈을 빼돌렸다며 구박하던 네 시부모의 모욕적인 언사에 당장에라도 박차고 일어나 뉴욕으로 돌아오려다 고개 떨구고 죄인처럼 잠자코 있는 너를 봐서 꾹 참았다.

시집식구 모르게 임신중절 수술을 도와 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초등학교만 졸업해서 영어 교통 표지판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너 대신 나는 겁도 없이 운전대를 잡고 LA 한인타운까지 달렸지. 네 시부모의 험상 굳은 몰골을 떠올릴 때마다 액셀을 세게 밟으며 우리는 자유를 얻은 듯 바닷가 프리웨이를 달렸는데…. 

시집살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친정식구를 부른 것이 너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줄이야!

이민 어느 가정이나 겪는 일이지만 먼저 사람이 부모 형제 불러들여 화목하게 사는 가정을 본적이 거의 없다.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듯 불러 달랠 때는 간을 듯이 잘하다가 막상 오면 이민생활 자리 잡는데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하면서 사이가 틀어진다. 잘한 일은 자기가 잘해서 됐고 일은 초청한 형제자매가 도와주지 않아서 됐다고 하며 부모 형제자매가 패가 갈라져 서로 헐뜯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너는 결국 시집식구 구박과 친정식구 불평불만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암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부부가 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려면 절대 형제자매 이민 초청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던 위층에 살던 오스트리아에서 일차대전 후 이민 온 부부의 충고가 빈말이 아니었다

Friday, April 17, 2015

The immigration Invitation

On the edge of my heart you sit sadly and occasionally climb up and make me sad.

You were born from poor family girl and failed the middle school exam. You were dragged to the sewing factory of Dongdaemun by the hand of your mother who did not give you a chance to take the second examination. You supported your family with your dexterity of the seamstress was excellent. In the early seventies, if a man married you and brought you to America he could earn a lot of money because you are good at sewing. You were sent to America to a man who wants to married.

You and I were together in a cousin's childhood. One year Christmas, I went to LA to see you. You held two newborn babies in your arms and sewed at the corner of your room. At the time of meal, you had to serve the elderly parents-in-law. When you came to the airport to pick me up, you were sick because lack of sleep. Even your good husband looked as if he was ashamed of you in your shabby appearance in a home dress with a seam.

Your parents-in-law had a strong territorial imperative that his son brought you to the United States. You were more like a moneymaking machine than a child 's mother. I was going to go back to New York in the insulting words of your parents-in-law who was saying that you took out the money for your poor family in Korea. However when I saw shivering like a sinner, I held back.

Your desperate request to help you with abortion surgery without knowing you’re family-in-law. You only graduated from elementary school and you cannot read English traffic signs properly. I took the steering wheel to run to L.A. Korean Town. Every time i recalled the unbelieving disgrace of your parents-in-law, I hit the accelerator and drove the freeway along the beach as if we were free.

Calling your family in Korea to escape from your marriage would make you even unhappier. 

As any immigrant family goes through, I have rarely seen a family living in harmony by inviting a parent to an immigrant invitation. When invite them, they are very good treating you, but when they come to the residence, they begin to complain that they want you to help them in the way they want to get into the immigration life. Finally, the parent and siblings are torn apart and tainted with each other.

The cousin eventually died of cancer at a young age, suffering from stress and complaints about her family-in-law members and siblings. To live happily and healthily, you should not lightly think about immigration invitation your parents and siblings. To live happily and healthily for a long time, should not think lightly about inviting immigrant parents and siblings from homeland. 

Saturday, April 11, 2015

내 고향 가든시티

퀸즈를 지나 롱아일랜드로 들어서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아련한 그리움이 일어난다. 고향인 서울에 가서도 느끼지 못하는 연민으로.

미국 와서 처음 정착한 롱아일랜드 가든시티였다. 사람들 모두가 차에서 내려 집으로 쏙 들어가고, 집에서 나와서는 차를 타고 사라졌다. 이렇게 저마다 바쁜 생활 속에서 더듬거리는 나의 영어를 들어 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어느 날, 외로움에 길을 방황하다 열려 있는 미국 교회에 들어가 뒤편에 앉아 있었다. 남편은 오르간을 부인은 하프를 연주하는 부부가 다가와 나의 외로움을 알겠다는 듯 반겨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가 없는 50대 초반의 이들 부부는 차이니스 요리학원에서 배운 음식을 만들어 나를 자주 집에 초대했다. 뉴욕시에서 하는 땡스기빙 퍼레이드를, 그들 부부가 애지중지하는 클래식 롤스로이스 차를 타고 가든시티 엔틱 카 퍼레이드도 참가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식당을 두루 찾아다니며 골고루 음식을 맛보게 해줬고, 페밀리 파티에도 초대하여 식구들과 함께 연휴를 보내기도 했다.

숫기가 없는 나는 그들이 애쓰면 쓸수록 더욱 부담되어 뒷걸음질 치다 결국, 뉴욕시로 학교를 옮겼다. 땡스기빙 때마다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내 손을 놓아줬지만, 결혼 이후엔 빠듯한 생활고로 선뜻 그들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

툭하면 가든시티 가까운 롱아일랜드 바닷가에 누워 그들을 그리워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아이가 걸을 즈음, 존스 비치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그들 집을 찾아 나섰다. 기억을 살려 찾아가니 이사 가고 없었다. 이웃에게 물어물어 어두워져서야 이사 집을 겨우 찾을 있었다.

집이 너무 크고 웅장함에 소심해진 나는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동양사람이 문을 열고 내다보고 얼마후에 부인이 나왔다. 바닷가에서 수영하다 추레해진 모습으로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갑자기 밤에 들이닥나를 보고 부인은 놀랐다. ‘무슨 일이 있느냐? 도와줄 테니 말하라.’며 예전처럼 반기는 그녀에게 그냥 보고 싶어 무작정 찾아왔다.며 그만 훌쩍이고 말았다.

모래 묻은 발로 소파에 올라가 난리를 치며 돌아다니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 유니폼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차이니스 메이드가 왔다 갔다 하는 아닌가. 하필이면 나처럼 생긴 동양인 메이드인가!

어디 가고 싶은 없어?” 남편이 물어볼 때마다 마음은 가든시티로 향한다. 수많은 기억 속에서도 까만 점으로 내몸에 바늘로 새겨진 문신과도 같은 McDonald(맥도날드) 부부가 아직도 생존해 있을까?’ 그분들이 있는 가든시티는 진정 마음의 고향이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기에.

Friday, April 10, 2015

My hometown Garden City

When I pass through Queens and into Long Island, I begin to have a deep nostalgia from the bottom of my heart. I feel with compassion that don’t feel when I go to my hometown, Seoul Korea.

The first place I came to the United States was Garden City in Long Island. All of the people got out of the car, entered the house, got out of the house and got in the car and disappeared. There was not a single person to listen to my stuttering English in such busy life.

One day, wandering the road to loneliness and went to an open American church and sat in the back. There were couples that of men playing the organ and a woman playing the harp approached me and welcomed as if they were aware of my loneliness.

The couple in their early 50s who had no children often invited me to their home by making food they learned at the Chinese Cuisine Institute. They took me to the Thanksgiving parade in New York City. I also enjoyed the adventure of the Garden City Antique Car Parade in their classic Rolls Royce car, which they pampered. Not only that, they brought me to various restaurants to taste but also invited me to the family party and spent the holidays with their family members.

The more they try, the more burdens I get, So I backed away at their efforts and eventually moved to New York City. They did not give up my hands until I was promised to visit every time I board, but after I got married I had no courage to show up in front of them.

I often stayed on the beach in Long Island near Garden City and missed them. When the second child was born and the child walked, I was lying on the Jones Beach and suddenly went looking for their home. I went to search for my memories, and they moved. I asked the neighbor and I was only able to find their new house when it dark.  

I hesitated to return my home because the house too big and grand. I took courage and pressed the doorbell. The Asian woman opened the door and after a while the wife came out. She was surprised to see me run into the night with children. 'What happened? Tell me. I will help you.” She said.  When I saw her greeted me as before, I sniffed.

I calmed down my children climbed on the sofa with sandy feet and I looked around. The Chinese maids wearing white aprons in black uniforms were going back and forth. Why was Asian maid looking like me?

"Where do you want to go?" Every time my husband asks me, my heart goes to Garden City. Is there a McDonald couple, like tattoos on my body with black dots in my memory are still alive? The Garden City where they are really home to me, but it's too far for me to approach.

Saturday, April 4, 2015

효녀 시누이

언젠가는 나도 시엄니가 되겠지만, 나는 시집 식구들의 참견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기야 좋아하는 사람도 없지만, 나 잘난 맛에 사는데 누가 감히 나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느냐는 심보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 식구들은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함경도 출신이라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고 대체로 착하다. 큰 시누이는 자기 생활에 충실하노라 친정과 올케들에게 전혀 말이 없다. 작은 시누이는 효녀다. 친정엄마를 위하고 특히나 장남인 큰오빠를 받들며 집안에 신경을 꽤 쓴다.

멀리 떨어져 살아서 서로 얼굴 자주 볼 일이 없어 다행이다. 문제는 까칠한 내가 LA 시집에 가면 생긴다. 신혼 초 돌아가신 형님이 시아주버니 즉 자기 남편 생일을 내가 챙기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했다. 내 남편 생일은 둘째치고 매 끼니 걱정하며 어렵게 사는 형편인지라 
"내가 챙길 수 있는 사람은 시부모 이외는 없어요. 각자가 알아서 챙기시오."
라고 서슴없이 내뱉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효녀 작은 시누가 섭섭했는지 아무 말 못 하고 훌쩍였다. 그 이후로도 내 앞에서 집안일로 섭섭하면 질질 짰다.

달랑 2,000불 가지고 LA에서 뉴욕에 온 화가 남편인 자기 오빠와 결혼해서 학생 론도 갚아 주고 전업 작가 만들어줬으면 됐지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섭섭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아니 효녀 하려면 자기나 하지 나에게 강요해서 뭔 이득이 있다고! 남이면 안면 몰수하면 되지만, 시누이 그것도 착한 사람이 이러니. 극도로 까칠해진 어느 날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내 얼굴만 보면 툭 하고 질질 짜는데 울지만 말고 뭐가 어떻게 섭섭한지 말해 봐요." 
시누이는 갑작스러운 내 전화에 놀라 망설이다 
"할머니와 엄마가 패물 팔아 작업실을 마련해 줄 정도로 뒷바라지했는데 어쩌고저쩌고큰오빠는 작은오빠만큼 제대로 공부도 못했는데 어쩌고저쩌고."
결혼 전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고리 골짝 옛이야기를 하면서 훌쩍였다전화 끊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남편은 중얼중얼 됐다.
"그건 미국 이민 올 때 전세금 빼서 다 돌려줬는데 왠 헛소리를 하는거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라고 큰오빠야 일찍이 공부하고는 담을 쌓아 그리된 거고. 시누이들도 대학원까지 공부하고서. 형제들이 희생하고 돈 벌어 내 남편을 뒷바라지했냐고요? 그런 일로 억울하면 유학 뒷바라지 한 우리 친정 부모는 원통해 어찌 살겠느냐고요그렇게 억울하면 오빠 데려가 살아요. 나도 네 화가인 오빠 모시고 살기 무척 힘들어요."
그 이후로 울음이 딱 멈췄다. 그야말로 직방이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 다르듯이 각자 효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다. 시부모가 사랑하는 내 남편, 내가 자린고비 혀 내두를 정도로 아끼고 아껴서 돈 걱정 없이 스튜디오에서 작업만 밀어붙이게끔 분위기 만들어줬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워 시부모를 걱정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효도 방법이다. 다른 형제에게 자기 효도 방법이 옳다고 들이대며 분란을 일으킬 일이 있느냐고!

이렇게 훌쩍이는 울음조차 듣기 싫어 오빠를 데려가라.’ 할 정도인 내가 나중에 시엄니가 되면 절대로 잔소리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한 짓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외국인 며느리를 선호한다. 잔소리가 먹혀 들어갈 만큼 영어 구사 능력이 힘에 부치는 나 자신을 알기에

Friday, April 3, 2015

The devoted sister-in-law

One day I become a mother-in-law, but I’m very loathsome of in-laws interfere. It is because I'm a big fan of myself, and there is my nasty mind says, whoever dares to tell me what to do?  

My parents-in-laws are from Hamgyeong-do in North Korea. They are expressionless and blunt. But in general, they are good people. An older sister-in-law is faithful to her own life. The yonger sister-in-law is a devoted daughter. She cares a lot about her family, taking care of her mother and especially her eldest brother.

It is fortunate that we don’t much to see each other in the distance, but the problem arises when I visit to the in-law-family in LA. The older brother-in-law’s wife scolded me for not taking care of her husband’s birthday. I don’t even have my husband’s birthday and worried about each meal living in a difficult situation. I spoke without hesitation, saying, "I will only take my parents-in-law' birthday, so each one should take care of it or not.” The devoted sister-in-law was sobbing that if she was upset when she was listening to what I said.

I got married to her brother who came to New York from Los Angeles with $ 2,000. I paid off his student loan he borrowed before our marriage and I backed him up to be able to do full-time artist. What more does she wants me to do? I am the one who should be sobbing. If you want to be devoted daughter, do it yourself. Don’t force me to do. There’s nothing to gain by forcing me. One day I became extremely frustrated, I picked up the phone.

"Whenever you meet me, you cry, tell me what’s wrong.” She was surprised by the sudden my phone call. She said hesitatingly, "My grandmother and mother backed your husband up so much that could rent a studio for him.” My husband said, “When I came to America, I took out the deposit and returned it all.” It was also an old story that I did not even know before the marriage.

Even if the mouth is skewed, say it correctly. “Did siblings sacrificed and made money and backed my husband? If you feel bad about such a thing, my parents who are backed me by studying abroad are so bitter that they can’t live through it. If you are that bitter, take your brother and live. I had a hard time living with your artist brother." After that, her tears stopped.

As each person has different ways of living, the way we devote ourselves to our parents may be different. I have supported my husband who is loved by parent’s-in-law could work in the studio without worrying about money and raising children well is my devote parents’-in-law. Is there anything else that could cause disruption to the other siblings by claiming their own way of doing the right thing?

I should not be nagging at all when I become a mother-in-law. So I prefer foreign daughter-in-law. I know myself that I am not strong in English ability enough to get nagg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