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28, 2008

공여사의 점쾌


종로 거리를 지나다 보면 길거리에 간이 천막을 치고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과는 달리 컴퓨터 앞에서 점을 치는 모습을 있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살기 좋은 요즈음 세상에도 답답한 사람들은 많은가 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공혜련이라는 점치는 여자가 있다. 한때는 이름에서도 풍기듯 중국 영화에 나오는 날렵한 주인공 모습이었다. 사십 후반으로 접어들자 통통하고 점잖은 모습이 그녀의 직업과 어울린다.

공 여사는 아들 하나에 일곱인 전라남도 시골의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바느질 공장을 전전하며 자리를 잡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남산 가는 길에 신문 배달하는 그녀를 처음 봤다. 이른 아침인데도 어찌나 화장을 곱게 했는지 잠에서 방금 깨어난 부스스한 모습이 부끄러워 슬쩍 지나치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밝은 얼굴로 인사.

신문 배달이 끝나면 요구르트 배달을, 가정집의 도우미로 쉬지 않고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바느질 공장에서 만난 그녀의 남편과 공장을 운영하다 망했다. 남편은  독촉에 시달리다 아들 둘을 남겨 놓고 어디론가 잠적했다. 그녀는 아들 둘을 키우며 반신불수가 친정엄마까지 모셨다. 틈틈이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자격증 그리고 고등학교 자격증을 받아 드디어는 동국 대학교 부설 명리 학과에 입학했다.

한문도 배워서 어릴 적부터 소소히 이 사람 저 사람 봐주던 일이 지금은 혜련사랑이라는 점집을 번듯하게 차렸다. 소문에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온. 그녀를 찾는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린다. 한번 손님으로 인연을 맺으 소소한 질문은 무료로 일종의 에프터서비스로 늘 바쁘다. 

그녀는 말이 없고 수줍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직업이 직업이니만치 지금은 아는 것도 많고 자신감에 넘쳐 말도 잘한다. 서울에 나갈 때마다 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력의 대가란 이런 거구나.' 하며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어느 부터인가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공 여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공 여사가 손금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어릴 때 바느질 공장에서 일하다 잘려 나가서 없고, 검지 잘려 나간 손가락을 잘못 붙여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 여사가 말하는 나의 점괘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잘려 나간 손가락에 시선이 간다. 
공 여사 자신의 점괘가 몹시 궁금해? 
내가 물었다. 공 여사 자신의 점괘가 좋아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한마디 하니 
복채를 두둑이 내면 봐줄게." 
나의 점괘에는 관심이 없는 내가 얄밉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살기를 바란다. 그녀는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Wednesday, August 27, 2008

The divination of madam Gong

If I walk along Jongno Street, there were many fortunetellers in tent. Unlike in the past, there was computer in front of them. Customers were constantly coming and going. I think there were a lot of people who were frustrated even in a world that is good these days.

There is a woman whose name is Gong Hye-ryeon, whom I have known for a long time. At one time, it was a sleek character in a Chinese movie, as its name suggests. As she enters her late 40s, her chubby and gentle figure goes well with her job.

Gong was born in a difficult family in the countryside of South Jeolla Province, with one son and seven daughters. She lost her father early, and came to Seoul after graduating from elementary school. She had a lot of hard time getting her seat around the sewing factory.

I first saw her delivering newspapers on the way to Namsan. Even though it was early in the morning, She had her make-up finely. She greeted me with a bright face at the moment I was about to past in shame of my boisterous appearance that had just awakened from sleep.

When the newspaper delivery was finished, she worked on yogurt delivery and nonstop as a house assistant. With the money she saved, she ran a factory with her husband, who she met at the sewing factory, and the factory went bankrupt. Her husband was suffering from debt and went into hiding somewhere, leaving behind two sons. She raised two sons and even served paralyzed mother. She went to a private institute for the qualification exam, got a middle school certificate and a high school certificate, and finally entered the department of Myong-ri, which is affiliated with Dongguk University.

Now she has a a fortune-telling shop called Hye-ryeon Love. There are quite a few people coming to hear the rumor. The phone rings constantly looking for her. Once you're connected as a guest, small questions are always busy with a kind of after service for free.

She was a reticent, shy person. However, now that her job is a job, She knows many things and speaks well with confidence. Whenever I go to Seoul, I admire her for her progress.' This is the price of hard work.' The people around her started calling her madam Gong.

Madam Gong looks into my palm. Her thumb was cut off at the sewing factory. The index finger is making a strange appearance by misplacing it. My divination, which she says, did not come in my ears, but my gaze went to her cut finger. "I am very curious about Madam. Gong's own divination?" "Give me a lot of fortune-teller's fee if you want to know," Gong said. 

I hope she will live a happy life, because she deserves to live happier than anyone else.

Thursday, August 21, 2008

까칠한 금자씨


얼마 전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그가 잘 아는 사람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 는 말을 하자 
! 까칠한 금자씨” 
 만나기를 꺼리는 눈치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머릿속에서 까칠한 금자씨라는 말이 떠나지를 않고 뱅뱅 돈다.  나 들으라고 한 말처럼. 

요즈음 주위엔 까칠한 금자씨들이 많다. 50 초반의 폐경기에 들어선 여자들이다. 우선 내가 까칠한 금자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30세까지는 공부한다고 석사니, 박사니 하며 난리를 쳤다. 시원한 돈벌이 하고는 거리가 공부를 하느라 결혼 못 한 친구들도 있고, 뒤늦게 결혼한 친구들도 있다. 나이 들어 낳은 아이들을 손주 키우듯 키우느라 요란들을 떨었다아이들을 대학 기숙사에 보내고 나니 그동안 본격적으로 하지 못한 커리어들을 살리느라 다시 난리들이다. 난리 통에 폐경기까지 겹쳤으니.

배운 공부를 살려 잘나가는 친구도 있고, 잘나가는 친구의 뒤를 보면서 부지런히 쫓아가는 이 있다. 아예 포기하고 다른 길로 친구도 있다. 50 초반이 되니 자리를 잡은 친구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그렇지 못한 이 아직도 힘들다

앞서가는 친구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뛰어야 하는 스트레스에 까칠해지고, 뒤쫓아가는 친구는 앞서가는 친구를 따라가지 못해 까칠하다. 아예 포기한 친구는 체념하고 살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지 해보고 싶었던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까칠해진다.

없는 마라톤 경기를 계속하고 있는 느낌이다. 올림픽 경기에서의 마라톤은 정해 놓은 거리를 뛰고 나면 끝난다. 그러나 우리가 가고 있는 인생의 마라톤은 정해진 길이가 없다. 죽을 때까지 뛰어서 죽음의 길로 가는 마라톤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열심히 뛰고 있다.

가끔 만나면 그나마 까칠한 면이 덜하다. 그러나 자주 만나다 보면 까칠함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그래서 친정아버지가 일러 주신 불가근불가원이란 옛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말라'는 도연명의 말이다. 너무 가까우면 까칠해져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너무 멀리하면 친구를 섭섭하게 해서 상처를 준다. 이래도 저래도 상처를 주, 받느니 아예 만나지 않고 사는 친구들도 있다.

스님이 깨달음이 없을 때는 산속 깊이 들어갔다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산에서 내려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깨달음이 없는 까칠한 50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조용히 살다가 60세가 되면 까칠한 금자씨들이 친절한 금자씨로 돌아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