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까칠한 금자씨”
만나기를 꺼리는 눈치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내 머릿속에서 ‘까칠한 금자씨’라는 말이 떠나지를 않고 뱅뱅 돈다. 꼭 나 들으라고 한 말처럼.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내 머릿속에서 ‘까칠한 금자씨’라는 말이 떠나지를 않고 뱅뱅 돈다. 꼭 나 들으라고 한 말처럼.
요즈음 내 주위엔 까칠한 금자씨들이 많다. 50대 초반의 폐경기에 들어선 여자들이다. 우선 내가 그 까칠한 금자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30세까지는 공부한다고 석사니, 박사니 하며 난리를 쳤다. 시원한 돈벌이 하고는 거리가 먼 공부를 하느라 결혼 못 한 친구들도 있고, 뒤늦게 결혼한 친구들도 있다. 나이 들어 낳은 아이들을 손주 키우듯 키우느라 요란들을 떨었다. 아이들을 대학 기숙사에 보내고 나니 그동안 본격적으로 하지 못한 커리어들을 살리느라 다시 난리들이다. 그 난리 통에 폐경기까지 겹쳤으니.
배운 공부를 살려 잘나가는 친구도 있고, 잘나가는 친구의 뒤를 보면서 부지런히 쫓아가는 이도 있다. 아예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간 친구도 있다. 50세 초반이 되니 자리를 잡은 친구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그렇지 못한 이는 아직도 힘들다.
앞서가는 친구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뛰어야 하는 스트레스에 까칠해지고, 뒤쫓아가는 친구는 앞서가는 친구를 따라가지 못해 까칠하다. 아예 포기한 친구는 체념하고 살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지 해보고 싶었던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까칠해진다.
끝없는 마라톤 경기를 계속하고 있는 느낌이다. 올림픽 경기에서의 마라톤은 정해 놓은 거리를 뛰고 나면 끝난다. 그러나 우리가 가고 있는 인생의 마라톤은 정해진 길이가 없다. 죽을 때까지 뛰어서 죽음의 길로 가는 마라톤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열심히 뛰고 있다.
가끔 만나면 그나마 까칠한 면이 덜하다. 그러나 자주 만나다 보면 까칠함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그래서 늘 친정아버지가 일러 주신 ‘불가근불가원’이란 옛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까이도 멀리도 하지 말라'는 도연명의 말이다. 너무 가까우면 까칠해져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너무 멀리하면 친구를 섭섭하게 해서 상처를 준다. 이래도 저래도 상처를 주고, 받느니 아예 만나지 않고 사는 친구들도 있다.
스님이 깨달음이 없을 때는 산속 깊이 들어갔다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산에서 내려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깨달음이 없는 까칠한 50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조용히 살다가 60세가 되면 까칠한 금자씨들이 친절한 금자씨로 돌아오려나!
스님이 깨달음이 없을 때는 산속 깊이 들어갔다가 깨달음을 얻고 나면 산에서 내려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깨달음이 없는 까칠한 50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조용히 살다가 60세가 되면 까칠한 금자씨들이 친절한 금자씨로 돌아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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