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9, 2018

줌바를 추며 신년을

내 주변의 지인들은 요리, 재봉질 등 하다못해 얼굴 화장도 매끈하게 잘한다. 그러나 나는 영 타고난 재주가 없는지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어릴 적 엄마는 사람들 모이는 곳에 가서 잘한다.’ 나서지 말라고 했다. 고달파진다고. 그래서였던가? 친정에 가서도 과일이라도 깎으려면 아버지는 손 빌라 놔둬라.’ 며 집안일 거드는 것을 말렸다. 지인들도 내가 뭔가 하려고 나서면 놔둬요. 가만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린다.

교생실습 가기 전 교수님이 절대 붓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던 기억이 난다. 소문나면 각급 담임 선생들이 각종 비품, 청소용 버킷부터 오만가지에다 매끈한 글씨체를 써달란다고 하니.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못 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과연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텐더다. 이것저것 섞어 술을 만들어 서브하며 사람들과 즐겁게 수다 떠는 것. 낮엔 열심히 작업하다 술맛이 당기는 어스름한 저녁에 술집으로 출근해 돈도 벌고 다른 사람의 삶을 엿듣는 것이다.

춤추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내가 또 원했던 것은 백댄서다. 앞에 나서서 주인공이 돼서 추면 좋겠지만 조명이 나를 향해 퍼붓는 것은 원치 않는다. 몸매가 받쳐줬다면 주인공 뒤에서 음악에 맞춰 신나게 몸을 흔들고 싶었다. 춤은 가는 허리선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다. 특히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날아다니듯 기분이 좋아진다

이상하게도 나는 나이를 처먹었는데도 허리 굵기에 아주 민감하다. 얼굴과 키야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니 포기했지만, 허리선만은 부지런하면 가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배가 나오기 시작하자 큰일 났다면 운동을 심하게 하며 곡기를 조절하다 몸져누운 적이 있다. 아픈 것보다는 배 나온 것이 차라리 낫겠다며 포기했다. 나온 배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올라와 견딜 수가 없다. 자다가도 옆구리 살이 얼마나 불었나 만져보다 밤잠을 뒤척거리기도 한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즐거움은 지속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계속하는 사람이 승자다.’ 어디선가 많이 들은 소리다.

내가 즐기는 춤으로 다시 도전했다. 유튜브 보고 따라 하며 수시로 흔들다 보니 예전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느라 오랜 시간 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곤 했던 때와는 달리 효과가 났다. 재미있어 수시로 흔들어대니 뱃살이 흐물거리다 주름이 생기며 가늘어졌다. 배가 푹 꺼질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나저나 빠진 살은 다 어디로 나가는 건가?

Zumba dance

People close to me are good at cooking, sewing, and also making makeup. But I don’t have anything to say about talent.

When I was a young, my mom said, when I went to a place where people gathered not to say 'I am good at.' Is that why? If I try to cut fruits even when I went to my parents’ home, my father said, "Leave it alone." And made me stopped the household chores. If I try to help something, my acquaintances said, “Leave it alone. It is helping to you stay still."

Before I went to the teaching practice, I remember that my professor told me not to say that I am good at writing calligraphy. If rumors come out, each homeroom teachers will want me to write smoothly the fonts on all kind of equipment and cleaning buckets.

Maybe it’s because I can't do what I wanted to do. What did I really want to do? It's a bartender. Serve with well mixing alcohol and chat with people happily. I work hard in the day and work at a pub on a twilight evening. I earn money and listen to others' lives.

What I really wanted to do was to be a back dancer. It would be nice to be main dancer, but I do not want the lights to pour on me. If I were in good shape, I wanted to shake my body behind the main character. Dancing is not only keeping a slim waistline, but it is good for health. Especially, it feels like flying as a free soul.

Strangely, I am very sensitive to my waistline, even though I am older. I gave up my face and height because I couldn’t help it, but if I am diligent, I could make my waist thin. A couple of years ago, when my belly started to come out, I would exercise too hard and sick. I’d rather choose fat belly than sick. I can’t bear the stress if I look down my belly. While sleeping I wake up and touch how fat the sides belly are.

'A genius can’t overcome a struggling person, and a struggling person can’t overcome those who enjoy. But the person who can win is the person who keeps doing what they like. The pleasure may not last, so the person who keeps going is the winner.’ We've heard a lot.

I try to make thin waistline again with Zumba dance. I watch Youtube and shake my body frequently, so it works differently from the previous exercise. I used to do things I didn’t want to do in the past, and I could not go out for a long time. But Zumba is fun. The belly fat is wrinkled and tapered. I have to continue until my belly is flat.

Anyway where is the entire missing fat going?

Saturday, December 15, 2018

시니어센터

누군가가 내 앞에서 재채기도 못 한다. 나도 덩달아 나올 것만 같다가 실지로 쫓아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짝이 아프다고 양호실엘 가면 나는 한술 더 떠 조퇴 할 정도로 갑자기 아파졌다. 하여간 희한한 체질임이 틀림없다.

소셜워커인 동네 친구가 시니어센터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며 알아보자고 했다. 평소 나와는 관련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던 '시니어'라는 말에 움찔거리며 아니 우리가 벌써 시니어.’ 당황했다호기심 많은 나는 친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날로 시니어센터 명단을 만들어 일일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맨해튼 웨스트 71 가부터 콜롬비아 대학 밑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 건강검진 후, 뼈가 약하다며 의사가 요가를 권한 후라 요가 클래스가 있나에 중점을 뒀다.

76 가에 있는 한 시니어 센터에 들어섰다. 입구에서부터 음식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렸다. 점심을 먹는 티켓을 받는 줄이었다. 게스트로 1.75전을 내고 티켓을 받았다. 45번이다. 일단은 밥부터 먹으며 분위기를 관찰해보기로 했다.

쟁반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입구에서부터 말을 건네던 비쩍 마른 여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옆으로 두 할머니가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포로리칸과 스페인 혼혈, 내 옆에 할머니는 터키와 이탈리안 혼혈로 아르메니안이란다. 대각선으로 앉은 할머니는 러시안 쥬위시였다.

나는 양이 너무 많아 반도 먹지 못했는데 그녀들은 죄다 해치웠다. 대단한 먹성들이다. 내가 남긴 음식을 보고 다음엔 컨테이너를 가져와 담아가서 디너로 먹으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점심과 저녁을 먹고 다른 곳에서는 아침을 먹는단다. 집에서 밥 할 필요가 없다며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나는 남편 때문에 하기 싫은 음식을 만들어야한다니까 남편 것을 싸가지고 가란다. 전형적인 뉴욕식 실용주의다.

시니어센터에서 트립도 가는데 노인들의 행동이 빠르지 않아 기다리는 것이 싫어 가지 않는다고 맞은편 할머니는 쉬지 않고 떠든다. 대각선 쪽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영어가 서툴고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는데도 계속 나를 향해 지껄였다. 이곳이 아니면 종일 입 벌릴 일이 없는 외로운 노인들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그들의 귀가 시원찮아 큰소리로 대꾸하다 목이 칼칼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이 들면 수다가 만리장성을 쌓듯 끊이지 않는다. 한국 할머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먼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쎄 다시 그곳에 올지는 모르겠다.

나는 늙지 않고 영원히 살아 시니어와는 관계가 없다고 착각 했었다. 그들과 함께 늙어가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은 심보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똬리 틀고 있나 보다.

Senior Center

Someone can’t even sneeze in front of me. I feel seem to I’ll sneeze out, and I'm actually following. When I was in school, my partner was sick and I suddenly got sick too, I would leave early school. It must be an unusual physical happening anyway.

A social worker, a friend of my neighborhood, told me about the senior center. I was surprised at the word "senior" which I thought was unrelated to me. "We are already seniors." However, as soon as friend’s word fell, I was curious and I made a list of senior centers and started visiting them from on that day.

From West 71st Street in Manhattan, I started looking under Columbia University. After the physical examination, the doctor said that my bones were weak and suggested yoga. I focused on whether a yoga class.

I entered a senior center in the 76th Street. The food smelled from the entrance. People waited in line. The line was to get ticket for lunch. I got a ticket after paying $ 1.75 as a guest. It is number 45. First of all, I tried to observe the atmosphere while eating.

I took the tray and sat at the table. A skinny woman, who was speaking from the entrance, sat opposite. Then, two grandmothers sat on the side. The woman sitting opposite me is combination of Puerto Rican and Spanish, and grandmother next me is a mixture of Turkey and Italian. Grandmother, who sat diagonally, was a Russian Jewish.

I had too much sheep and I could not eat half of them, but they ate all of them. When they saw the food I left, told me to bring container and take to home eat it as a dinner. They eat lunch and dinner here and eat breakfast elsewhere. They say, there is no need to cook at home. I have to cook for my husband. They told me to pack the food up and go. It is a typical New York pragmatism.

The grandma opposite me kept on talking about senior center trip that she doesn’t want to go because the elderly don’t act fast on their trip. Sitting on the diagonal, the grandmother kept on speaking at me, even though she was clumsy in English and could not understand her pronunciation. It must be lonely elderly people who will not open their mouths all day long. In addition, their ears were not good, and my throat became sore when I responded loudly. My head was pounding. Old people can’t stop talking like the Great Wall of China. It is incomparable to Korean grandmothers. I could not help getting up first. Well, I do not know if I'll go there again.

After eating, I visited three or four more places and I found the place to learn yoga. However, I hesitate to go there. I had the illusion that I didn’t get old and had nothing to do with seniors. There must be a deep-seated feeling in my heart that I don’t want to admit to growing old with them

Saturday, December 1, 2018

걱정은 욕심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그게 다 욕심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욕심의 노예가 돼서 사는 것 같다.’ 배우 신성일 장례식에서 부인 엄앵란이 한 말이다.

아주 오래전, 나는 동부이촌동에 있는 한강 남자 중학교 미술 선생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학교라 유명인 자식들이 많았다. 엄앵란 아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교실 중간 뒤 오른쪽에 앉아 수업을 듣던 속눈썹이 길고 아주 잘생긴 조용한 아이였다. 방과 후 청소하지 않고 애들이 땡땡이를 쳐도 그 아이는 조심스럽게 빗자루질을 했다. 통통한 아이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기특한 녀석이네!’ 한 적이 있다.

엄앵란이 화장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딸과 아들을 데리고 오다 딸은 길 건너 여자 중학교로 아들은 한강 남자 중학교로 등교시켰다. ‘배우 맞아?’ 할 정도로 수더분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력서를 여기저기 냈지만, 취직이 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다. 대부분 오라는 곳은 세일즈맨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다단계 판매와 진배없는 직장들이었다. 결국에는 교육 공무원 순위 고사를 봤다. 참 치사하게도 선생이 되기 전까지는 선을 보거나 데이트를 해도 남자들이 키가 작네! 몸이 약하네! 하며 반기지 않던 나를 선생이 되고 나니 결혼하겠다는 작자들이 슬슬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취직 걱정은 사라졌지만,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나로서는 또 다른 걱정이 앞섰다. 내가 선생이라는 점을 보고 다가오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난 돈 버는 노예가 될 수가 있다. 라는 생각에 인간에 대한 환멸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공부 잘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어련히 다른 선생에게도 사랑받고 주의를 끌었다. 물론 부모가 유명인의 자식들도 그리고 치맛바람 엄마를 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병상련이라도 되는 듯, 조용히 나대지 않는 아이나, 동성애자 성향으로 왕따당하는 아이나, 미술 재료 사기도 어려울 만큼 가난한 아이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처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를 배회했다.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 깨갱대는 나를 달래 보내려고 엄마는 무척이나 애쓰다 결국엔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데로 살라고 했다. 하루하루 교단에 설 때마다 다 버리고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드디어는 돌출 구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올랐다.  

뉴욕, 이곳에서도 쓸데없는 걱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며 산다.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 한 끝없는 걱정의 고행길을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