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나는 동부이촌동에 있는 한강 남자 중학교 미술 선생이었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학교라 유명인 자식들이 많았다. 엄앵란
아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교실 중간 뒤 오른쪽에 앉아 수업을 듣던 속눈썹이 길고 아주 잘생긴 조용한 아이였다.
방과 후 청소하지 않고 애들이 땡땡이를 쳐도 그 아이는 조심스럽게 빗자루질을 했다. 통통한 아이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기특한 녀석이네!’ 한 적이 있다.
엄앵란이 화장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딸과 아들을
데리고 오다 딸은 길 건너 여자 중학교로 아들은 한강 남자 중학교로 등교시켰다. ‘배우 맞아?’ 할 정도로 수더분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력서를 여기저기 냈지만, 취직이 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다. 대부분 오라는 곳은 세일즈맨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다단계 판매와 진배없는 직장들이었다. 결국에는
교육 공무원 순위 고사를 봤다. 참 치사하게도 선생이 되기 전까지는 선을 보거나 데이트를 해도 남자들이 키가
작네! 몸이 약하네! 하며 반기지 않던 나를 선생이 되고 나니 결혼하겠다는
작자들이 슬슬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취직 걱정은 사라졌지만, 결혼 적령기에 있는 나로서는 또 다른 걱정이 앞섰다. 내가 선생이라는 점을 보고 다가오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난 ‘돈 버는 노예’가 될 수가 있다. 라는 생각에 인간에 대한 환멸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공부 잘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어련히 다른
선생에게도 사랑받고 주의를 끌었다. 물론 부모가 유명인의
자식들도 그리고 치맛바람 엄마를 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병상련이라도 되는 듯, 조용히 나대지 않는 아이나, 동성애자 성향으로 왕따당하는 아이나, 미술 재료 사기도 어려울 만큼 가난한 아이들에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처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를 배회했다.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 깨갱대는 나를 달래 보내려고 엄마는 무척이나 애쓰다 결국엔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데로 살라고 했다. 하루하루
교단에 설 때마다 다 버리고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드디어는 돌출 구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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