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8, 2013

1차선, 2차선 아니면 지방도로로

세월이 갈수록 배달되는 연말 카드 수가 점점 줄어든다. 인터넷 탓일까? 창가에 놓고 밖을 내다 때마다 들여다본다. 보내는 카드 없이 받기만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연말이 다가오면 카드뿐만 아니라 친구 중 한두 명이 항상 잊지 않고 조심스럽게 교회 나갈 것을 권하며 종교 서적을 보내오기도 한다. “자기는 다 갖췄는데 하나님을 영접 못 해 안타까워.’ 구원받아야 천당 가지.” 
"교회 안 나가면 지옥 가요.’"
동네 아저씨가 말했던 것보다는 훨, 아주 훨씬 낫지만.

아주 오래전 그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가장 친한 친구 둘과 만났다. 촛불 아래서 술잔을 부딪치며 각자 바람을 중얼거렸다.

한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림 같은 집에 살며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층계를 내려와 퇴근해 돌아오는 남편을 반기고 싶어."
그저 그런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장면 같은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소원대로 저택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또 다른 친구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그림 그리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50년대 독일 유학을 다녀온 전혜린은 당시 먹물 먹은 여성들의 슬픈 우상이었다. 전혜린을 흠모했던 이 친구는 결국 파리로 유학 가서 네덜란드 남자와 결혼해 암스테르담에서 작업에 몰두하며 멋진 삶을 살고 있다.

글쎄 나는 두 친구보다는 남자들이 홱 가닥 뒈잡아지는 모양새가 아니라서 거창한 소원은 바라지 못하고 선생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도 작업도 계속하고 싶었지만, 한국을 떠나는 것이 꿈같던 시절이라 감히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간절히 바랬었는데, 선생을 하다 뉴욕까지 왔다.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면 적어도 비슷하게는 있다."
것을 살면서 여러 번 느꼈다. 우리 집의 딱히 정해진 가훈은 아니지만 진인사대천명’,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되고 온 힘을 다한 다음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나이가 든 지금도 소원이 있다.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온 힘을 다하지 않아 하늘의 뜻이 미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지 어떡하겠는가! 친정아버지 말대로 
"1차선이 아니면 2차선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요즘 포장도 잘 돼 있는 지방도로로 가면 되는데 뭔 걱정이냐?"

뭉쳐진 솜사탕만 눈이 쏟아지다 작아지더니 이네 그쳤다
"내리는 눈송이처럼 각각 흩어져 바삐 살아가는 독자 여러분의 원하시는 일들이 새해에는 이루어지 바라며 추운 겨울 포근하게 보내세요."

Friday, December 27, 2013

First lane, second lane, or pave roads

As the years go by, the number of year-end cards delivered decreases. Is it because of the Internet? I put them by the window and look at it whenever I look out the window. I feel sorry because I only receive them without sending a card.

When the end of the year draws near, not only cards, but also one or two of my friends always send religious books, urging me to go the church carefully. "I'm sorry you didn't believe God even though you got everything. You'll go to heaven if you got salvation." It's a lot better than ‘If you don't go to church, you'll go to hell.’

It was the last day of the year a long time ago. After graduating from college, I met two of my best friends who had been wandering around without finding a suitable job. We bumped the wine glass under the candlelight and murmured.

A friend opened her mouth first. She said something like a Hollywood-style movie scene, 'I want to welcome my husband who lives in a picturesque house and comes back from work gracefully in a dress. She set up a newlywed house in a mansion as she wished.

Another friend said, 'I want to go to Paris, France, and live freely.' Jeon Hye-rin, who studied in Germany in the '50s when the scars of the war were not healed, was an idol of women. The friend, who adored Jeon Hye-rin, eventually went to Paris to study and marry a Dutch man and leads a wonderful life, engross in her work in Amsterdam.

Well, I don't have the appearance the men will fall in love me than the two friends, so I said, "I want to be a teacher without asking for a big wish." I wanted to study abroad, but I didn't dare spit out of my mouth because leaving Korea was like a dream, but I came all the way to New York after being a teacher.

I have felt many times in my life that 'if I try to hope and try, I can at least be similar.' It's not a family motto, but I should not just wish for it, and leave it to heaven after doing everything I can.

Even now when I'm older, I have another wish besides painting. I'm doing my best for it and waiting. If it doesn't come true, I'll admit that I were not doing everything I can and the will of heaven is not up to me! Like my father said, "If it's not the first lane, it's the second lane. If it's not, it's the paved roads. What are you worried about?"

Saturday, December 21, 2013

우울한 방문

"아버님이 당신에게 아파트 물려준다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 공증해 놔야 해.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시고 나서 복잡해 진단 말이야. 당신 할 수 있겠어? 오늘 해. 더 미루면 안 돼. 알았지." 

어느 여자가 남편에게 초조한 듯 간절한 목소리로 전화하는 소리가 병원 휴게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불안한 듯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여자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아버지가 위급하다고 해서 서울에 나가 병원을 들락거렸다. 병간호인이 24시간 붙어 있어 굳이 할 일도 할 말도 없는 나는 주위 사람들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모두가 금전 이야기이다. 그것도 내 소유가 아닌 것을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였다.

돈은 은행하고만 이야기하는 뉴욕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이런 음습한 수작을 들으며 숨죽여 긴장해야 했다. 병간호인도 그 틈을 타서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임에도 돈을 주면 좋아한다고 은근히 효도 운운하면서 나를 꼬드겼다. 환자가 챙길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유와 인심이 곳간에서 나오듯 항상 주저하지 않고 뒷주머니에서 꺼냈던 아버지의 두툼한 지갑과 통장의 행방은 어디로 갔는지…. 
"어딜 가느냐?"
검사받으러 이동할 때마다 혼자 버려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휘둘러보곤 하셨다.

몸이 아픈 것보다 불안이 환자를 힘들게 했다. ‘그냥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을 텐데는 옛말로, ‘욕심 있는 자식이 누워있는 노인에게 강제로 자신에게 물려 주게끔 강요하는 것이 요즈음 한국의 대세란다.

저녁도 거르고 숙소로 돌아와 잠에 빠졌다.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보고 침묵해야 하는 괴로움에 밥맛을 잃었다. 뱃속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뭔가 먹어야 한다. 허기진 배를 안고 숙소를 나와 신사동 가로수 길을 걸었다.

쇼윈도를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의 물결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옆길로 빠졌다. 술집이 끝없이 이어지고 철판 위에 갖다 쏟아놓은 듯한 지글거리는 붉은 음식을 놓고들 술 취해 제정신들이 아니다. 내가 들어갈 만한 곳이 없다. 모두가 젊고 싱싱한 젊은이들뿐이다.

길바닥 하수구 맨홀에서 올라오는 시쿰한 시궁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배고픔이 확 달아났다. , 돈 하는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먼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Friday, December 20, 2013

A gloomy visit

'You have to have sure your father's going to give you the apartment. And you have to leave it notarized. Otherwise, it's complicated after his death. Can you do it? Do it today. You can't postpone it any longer. Okay.'

I could hear a woman talked to her husband in a nervous and earnest voice, sitting in the hospital lounge. Touching the phone nervously, the woman who had been thinking about something for a while left with a confident smile.

I went to Seoul to visit the hospital because my father was in an emergency. There was a caregiver 24-hour to take care of my father. I, who had nothing to do, was fascinated by the stories of people around me. The stories of people are all about money. It was how to make it for mine what is not mine.

I got used to living in New York where money is only talked to banks, I had to keep my breath down to hear this shady trick. The caregiver secretly enticed me by saying, "if you give me money, I will hold for your father to spend when he needs. Where did my father's fat wallet and bankbook go, which he always took out of his back pocket without hesitation, as if his leisure and humanity were coming out of the barn?

"Where am I going?" Every time he went for a physical examination, he would swing around with anxious eyes to see if he was left alone. Anxiety made him harder than sick. 'If he hold his wealth until his life is over, at least he won't be anxious'. It is a great trend in Korea these days that a greedy child is forced to let the sick old man to hand over his property to him.

I skipped dinner and came back to my lodging and fell asleep. The pain of having to be silent at the sight of my anxious father lost my appetite. I opened my eyes to a loud noise from my stomach. I have to eat something. I left the lodging with a hungry stomach and walked down the Garosu-gil in Sinsa-dong.

It was hard to even walk with the waves of young people snooping around the show window. I walked to a side road. The bar went on endlessly. Lots of people drunk and out of their mind. There's no place for me to go in. All are fresh young people.

I smell of the gutter coming up from the manhole in the roadbed sewer poking my nose. Everyone cries for money, money. I have to get out of this dark place and go back to the faraway.

Saturday, December 14, 2013

창가의 선인장

기대어 의지할 마음도 없이 가시로 온몸을 감싼 선인장은 외롭다. 단지 물을 기다리며 햇볕을 향한 몸놀림뿐이다.

누군가 이사하면서 내팽개쳐버린 잡동사니 속에서 새끼손가락만 선인장이 나를 빼꼼히 내다봤다. '제발 데려가 달라.'는 둣 쳐다보는 선인장을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갔다. 물기 빠져 푸석푸석한 선인장을 가져다 화실 창가에 놨다

공항 휴지통에 처박힌 꽃다발도 살릴만하다고 챙겨온다는 친구의 유능한 의사 남편이 생각난다. 사람이건 꽃이건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경외롭다.

내가 화초를 쳐다보기만 해도 죽인다.’며 탓하는 남편의 푸념이 떠올랐다. 그러나 쓰레기 더미에서도 살려고 애쓰는 선인장은 스스로 클 것이다.

집 앞마당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 그늘에서 찍은 남편의 어린 시절 흑백사진이 정겹다. 남편은 시골 냄새가 진하게 밴 서울 변두리에서 자랐다. 널따란 집 앞 텃밭에 채소를 길러 먹고 꽃밭에서 뛰어놀며 메뚜기를 잡아먹었다니 농촌생활과 매한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억으로 대도시 뉴욕에 살면서도 화초에 대한 미련이 강하다. 인간성 또한 텃밭의 흙과 화초처럼 풋풋하다고 할까?

반면에 나는 땅을 밟아 본 기억도 없다. 성냥갑 같은 시멘트 공간에서 자라서인지 화초가 죽을 것이 염려되어 키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죽이느니 차라리 피하자는 식이다. 그나마 돌보지 않아도 죽지 않는 선인장이라면 몰라도.

창가 구석에 놓고 오랫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았선인장이 엄지손가락 크기로 커져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인심이라도 쓰듯이 물을 줬다. 환해지며 생기가 돌았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기에 스스로 자생하며 버티어오다가 갑자기 따스한 손길을 받으며 영양분이 가해지자 부쩍 크기 시작했다. 햇볕을 향해 돌아가는 몸놀림이 며칠만 소홀하면 구부러져 실로 벽에 묶어 놓았다.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선인장 서너 개를 사다 친구를 만들어 . 틈틈이 음악을 틀어주며 물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급기야는 들여다보며 대화하듯 지껄이는 날이 잦아졌다.

창밖을 내다보는, 온몸에 가시를 품고 빛을 향해 몸놀림 하며 물을 기다리는 선인장을 나는 점점 닮아간다. 

Friday, December 13, 2013

Resembling a cactus

The cactus, which is wrapped all over with thorns, is lonely, with no intention of leaning. It's just a body play towards the sun, waiting for water.

A cactus with only the size of a baby's finger looked at me in the jumble. As if "please take me with you." I just passed by the staring cactus. I went back, and I took cactus and put it in the window of the studio.

It reminds me of my friend's husband, a competent doctor, who brought a bouquet of flowers stuck in an airport trash can as well. I can't help but admire his commitment to saving lives, whether they are people or flowers.

My husband's used to blame me for "You kill the plants just by looking at them," But the cactus that tries to live in the garbage dumps will grow on it’s own.

His black and white photograph of my husband’s childhood taken in the shadow of the loofahs hanging in the front yard of a house are so nice. He grew up on the outskirts of Seoul, where the smell of the countryside was strong. He grew vegetables in a garden in front of a spacious house, ran around in a flower garden, and ate grasshoppers. With this memory, even though he lives in big city New York, he has strong lingering feelings for plants.

On the other hand, I don't even remember stepping on the ground. I grew up in an apartment like a matchbox of cement.  I'm afraid that the plants will die, so I don't think about raising them at all. It would be better to avoid than to kill. I don't know if it's a cactus that doesn't die without taking care of it.

The cactus, which has been sitting in the corner by the window for a long time, has grown to the size of the thumb and is staring at me. I gave it water. It was bright and lively. Suddenly began to grow bigger when nutrients were added. The movement toward the sun was bent. I tied to the wall with thread.

I felt sorry for being alone, so I bought three or four cactus to make friend. I was anxious to play music and water it. At last, I looked into the cactus and chatted more often.

I am becoming more and more like a cactus with thorns all over my body looking out the window and waiting for water, yearning to the sunlight.

Saturday, December 7, 2013

생긴 대로 삽시다

형부 잘못했어요.” 
한마디에 집안 식구 모두 모여 무사히 추수감사절을 보낼 수 있었다.

지난 노동절에 언니 내외 그리고 여동생 식구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동생 남편은 한국인이 아니라 설까? 동생에게 잘한다. 한국 남자 특히 많은 나이 든 남자들은  떡하니 버티고 앉아 머슴 부리듯 와이프 부려 먹는다.

스칸디나비아와 영국 혈통인 동생 남편은 지성과 외모를 겸비했다. 그뿐만아니라 40살에 낳은 딸을 애지중지 본인이 키우다시피 하며 집안일도 거든다.

자기 남편과는 다르게 언니들을 대하는, 특히 큰 형부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동생은 즐겁게 밥 먹다 술기운에 "형부는 왜 언니를 그렇게 대우해요?"
한마디 했다. 내가 끼어들며 거들자 잠자는 불씨에 불이 붙기 시작하며 언니까지 끼어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내 남편도 활활 타오르려는 불꽃에 
형님, 어쩌겠습니까? 세상이 이렇듯 변하니 우리도 거기에 맞추는 척이라도 해야지요.” 
형부는 당황하고 모두의 언성이 높아졌다. 여동생 남편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슬그머니 어디론가 고양이처럼 숨어버렸다.

동생은 남편이 얼마 벌고 얼마 가졌는지 모른다. 남편이 알아서 빌( Bill) 내고 동생이 일하면 생활비에 보태고 일하지 않을 때는 남편이 주는 돈으로 쓴다. 그렇다고 일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 경우엔, 남편이 번 돈도 내가 관리한다. 하물며 길에서 주운 돈도 가져다준다. 남편은 대충 얼마 있는지는 알지만, 세세히는 모르고 체크 한 장 써 본 적 없다. 걱정 없이 잠 잘 자며 항상 본인이 부자라고 착각하며 산다. 나는 일하러 밖에 나가지는 않지만, 부엌일과 아이들 키우는 것은 내 차지다. 큰돈은 없어서 못 쓰고 푼돈이나 쓰면서 조금 있는 돈을 이리저리 메꾸느라 걱정하며 내 것인 양 좋아한다.

그런데 언니 부부는 돈은 따로따로, 집안일과 돈 메꾸는 일은 언니가 도맡아 하니 옆에서 보는 우리가 하도 딱해 술김에 에라 모르겠다, 데모대가 길바닥에서 악을 쓰듯 
"언니는 억울하다."
찝쩍댔다. 형부의 화가 하와이 용암 끓듯 끓어 올랐다.

미국에 오래 살다 보니 각자 생긴 꼴대로 살자. 남의 일 참견 없이 사는 모습이 한국식 정나미는 없어도 그지없이 속 편하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있는 한국식 정서가 마치 한국 연속극 한 토막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요번 추수감사절은 동생이 초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화를 풀지 못한 형부가 오지 않겠다고 버티고 언니만 오겠다니 내 남편이 나설 수밖에. 터키를 못 먹는 남편은 
형님 제가 직접 요리하는 왕새우 튀김에 해물 전골 그리고 사시미 어때요? 우리 집에서 한잔합시다.” 
언니가 가져온 샐러드와 백김치, 동생이 구운 사과와 호박파이에 우리는 모두 언제 싸웠냐는 듯 먹고 마시며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