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사하면서 내팽개쳐버린 잡동사니 속에서 새끼손가락만 한 선인장이 나를 빼꼼히 내다봤다. '제발 데려가 달라.'는 둣 쳐다보는 선인장을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갔다. 물기 빠져 푸석푸석한 선인장을 가져다 화실
창가에 놨다.
공항 휴지통에 처박힌 꽃다발도 살릴만하다고 챙겨온다는 친구의 유능한 의사 남편이 생각난다. 사람이건 꽃이건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경외롭다.
공항 휴지통에 처박힌 꽃다발도 살릴만하다고 챙겨온다는 친구의 유능한 의사 남편이 생각난다. 사람이건 꽃이건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경외롭다.
내가 ‘화초를 쳐다보기만 해도 죽인다.’며 탓하는 남편의 푸념이 떠올랐다. 그러나 쓰레기 더미에서도 살려고 애쓰는 선인장은 스스로 클 것이다.
집 앞마당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 그늘에서 찍은 남편의 어린 시절 흑백사진이 정겹다. 남편은 시골 냄새가 진하게 밴
서울 변두리에서 자랐다. 널따란 집 앞 텃밭에 채소를 길러 먹고 꽃밭에서 뛰어놀며 메뚜기를 잡아먹었다니 농촌생활과
매한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억으로 대도시 뉴욕에 살면서도 화초에 대한 미련이 강하다.
인간성 또한 텃밭의 흙과 화초처럼 풋풋하다고 할까?
반면에 나는 땅을 밟아 본 기억도 없다. 성냥갑 같은 시멘트 공간에서 자라서인지 화초가 죽을 것이 염려되어 키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죽이느니 차라리 피하자는 식이다.
그나마 돌보지 않아도 죽지 않는 선인장이라면 몰라도.
창가 구석에 놓고 오랫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선인장이 엄지손가락 크기로 커져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인심이라도 쓰듯이 물을 줬다. 환해지며 생기가 돌았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기에 스스로 자생하며 버티어오다가 갑자기 따스한 손길을 받으며 영양분이 가해지자 부쩍 크기 시작했다. 햇볕을 향해 돌아가는 몸놀림이 며칠만 소홀하면 구부러져 실로 벽에 묶어 놓았다.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선인장
서너 개를 사다 친구를 만들어 줬다. 틈틈이 음악을 틀어주며 물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급기야는 들여다보며 대화하듯 지껄이는 날이 잦아졌다.
창밖을 내다보는, 온몸에 가시를 품고
빛을 향해 몸놀림 하며 물을 기다리는 선인장을 나는 점점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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