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사는 대학 친구가 몇 달
전부터 뉴욕에 온다더니 드디어 비행기를 탄다고 전화가 왔다. 그런데 그날부터 나는 배탈이 났다.
하루 자고 나면 날 일 아닌가. 그러나 며칠 계속됐다. 기운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장바구니를 끌고 문을 나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도로
들어와 누웠다.
친구를 피하려고 꾀병을 앓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자고 연락했다. 무덥던 날씨가 하필이면 그날은 어찌나 싸늘한지. 친구는 뉴욕에 사는 지인이 줬다는 알록달록한
코트를 입고 머리는 거의 삭발을 한 채 나타났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인가? 아마 10년 전 그녀가 뉴욕에 왔을 때였나.
“너 하나도 늙지 않았다.
주름도 없네. 눈도 처지지 않고.”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너 눈이 몹시 망가졌구나. 안경 끼고 자세히 봐. 나 너무 늙었어.”
둘 다 이젠
늙어 서로 위로한답시고 헛소리를 한동안 했다.
이상했다. 그렇게 앓았는데 춥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둘이 팔짱을 끼고 걷다 보니 가슴 밑바닥에서 옛정이 확 밀어 올라왔다. 친구가 길가에서 파는
땅콩을 먹고 싶다기에 사줬다. 먹고 싶다는 것을 다 사주고 싶었다. 그녀도 나의 얇은 옷차림이 안쓰러웠는지 자꾸 두꺼운 옷을 사주겠단다. 우리는 걷다 쉬다 반복하면서
맨해튼을 거닐었다. 모던 아트 뮤지엄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이미 날은 어둑해졌다.
이상했다. 담배를 피지 않던 친구가 수시로 피웠다.
“별일 아닌 것을 가지고 큰일인 듯 조잘거리는 너는 살만하구나?”
하며 친구가 뜬금없는 질문을 나에게
했다. 그리고는 내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슬픈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불덩이라도 맞은 듯 갑자기 친구의 눈이 붉어지며
콱 울다가 멈췄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우리 큰아들 죽었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담배 하나만 줘봐.”
몇십 년 만에 물어보는
담밴가!
“죽은 아들 기일이 다가와서 그동안 참았던 울음이 쏟아졌어.”
우리는 담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담뱃불로 들판을 죄다 불 질러 태우고
싶었다. 만약 그렇게라도 해서 그녀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가슴이
쓰라리고 먹먹해 자꾸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팔짱을 더욱 꽉 끼고 어두운 밤길을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쓰라린 가슴이라도 녹이려는
듯 그녀는 계속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일본 식당에 들어가 새우 우동에 슬픈 얼굴을 처박고 말없이
국수 가락을 입에 넣었다.
어두컴컴한 골목 벽에 기대어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무거운 그림자를 뒤로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서는 내 두 다리는 마치 깊은 수렁에서 끌어내듯 무겁고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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