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20, 2012

해피밀

성당 종소리가 아홉 번 울렸다. 지붕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던 비둘기들이 요란스럽게 회색 하늘로 날아오른다. 흐트러져 날아오른 비둘기들은 어느새 정확한 간격으로 질서 정연하게 또 다른 지붕을 찾아 날아간다.

동네 성당 앞에서 성호를 그으며 지나는 사람들을 보고 자란 우리 아이는 어릴 때 성당 옆 맥도날드 앞을 지날 때마다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해피밀을 먹게 해달라고.

아이는 엄마가 햄버거 사줄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까? 조르지는 못하고 성호를 서너 번씩 긋기만 했었는데. 하느님에게 엄마 아빠가 돈 많이 벌어 해피밀을 많이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된 아이는 아무리 허기져도 맥도날드에서는 먹지 않는다. 가끔 비싼 레스토랑 앞에 서서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뒷모습이 심각하다. 성호를 긋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아이가 간절히 해피밀을 위해 기도 할 때 나도 정한수 떠 놓고 비는 심정이었다. 옛 아낙네들이 오직 복을 달라고 빌기만 했을까. 비는 정성만큼 자식을 키웠겠고 남편을 뒷바라지하지 않았을까.

오래전 멕시코 시내를 관광하다 오래된 낡은 교회에 들어갔다.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아무도 없는 복도 벽에 있는 성상 난간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꼈다. 이 여인의 간절한 모습에서 정한수 떠 놓고 비는 우리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을 봤다.

북적거리는 맨해튼을 거닐다 성당에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기도한다. 고요하게 착 가라앉은 어둠 속의 깊은 적막감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기도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의 간절함이 나의 간절함이 되어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종로 근처 사찰 대웅전에 앉아 불공드리는 아낙네들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기도한다. 실내의 어둡고 밝기의 차이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의 차이뿐이지 경건함은 성당이나 사찰이나 똑같다. 나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앉아 있다 나온다.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창가의 푸른 잎 사이로 삐죽이 솟아오른 선홍색 제라늄을 보며 감사의 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떠도 하고 잠들기 전에도 한다. 눈에 보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해피밀을 사줄 수 없던 처지에서 비싼 레스토랑에서도 사 줄 수 있는 처지까지 왔다는 것이 오직 나의 노력만은 아닐진대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그 어떤 나도 모르는 보살핌이 분명히 있었다는 생각이 나를 끊임 없이 감사의 기도를 하게 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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