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도 아니고 한 주일가량을 동고동락하는 거대한
유람선 안에서 그럴 수가. 일부러 모른척하는 것이 더 피곤할 텐데!
크루즈에서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 아니 그 많고 많은 배 중에 같은 배를 타다니! 매우 반가워 환하게 웃으며 인사라도 나누려 하니 웬걸,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잘 못 봤나. 한국사람이 많지 않은 것을 보니 중국사람인가?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하도 모른 체를 하니 헷갈렸다.
배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한번 갇힌 이상 그 안에서
맴돌기 마련이다. 뷔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봤다. 일부러 그녀 주변 식탁에 가서 앉았다. 또다시 아는체하려 했으나 계속 시선을 책에 두고 얼굴을 들지
않았다. 자리를 맡아 놀 요량으로 읽던 책을 남겨 놓고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슬쩍 책 겉표지를 보니
한국 책이다.
데크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또
봤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나는 가까이 가 앉았다. 정말 내가 잘못 보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해서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봤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에서 보는 여자가 확실한데 혼자 쉬고 싶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오래전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한국사람이세요?”
인사를 건네니
"전 한국인과는 이야기 안 합니다."
무뚝뚝하게 내뱉던 중년 남자의 기억이 획 스쳤다.
함께 탄 남편이라고는 캐빈에서 나오지도 않고 발코니에서
출렁이는 바다만 보고 있으니 일주일 이상 망망대해를 달리는 배 안에서 말할 상대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고만해. 싫대잖아 왜 자꾸 아는
체하는데.”
드디어 남편이 견디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확 뭉개진 자존심으로
더 이상은 마주쳐도, 옆으로 스쳐도 모른 체했다. 수영,
조깅 요가, 춤추러 다니다 저녁엔 극장으로, 바삐 혼자 스케줄에 따라 돌아다녔다. 잘 놀다가도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 왜 일그러져 anger (화)로 가득 찬 그 여자
얼굴이 떠오르며 울렁이는지.
"우울증인가? 사업이 망했나?
이혼했나? ‘왜 모른척하느냐고."
남편도 드넓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다. 60년대 말 시아버지는 마이애미에서 떠나는 크루즈에서
3년간 셰프로 일하셨다.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배 안에서 일만 한 아버지를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풀리지 않는 기분 나쁜 현실을, 남편은 지나간 과거를
되새기며 즐겁지 않은 여행은 끝났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에 그녀가 나타났다. 크루즈에서의 그 옷차림으로. 눈
한번 주지 않는다. 살다 보면 삶이 참을 수 없이 버거워져 사람들과 아는체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으로서의 기본 감정까지 팽개치면서 자신을 웅크리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배에 탄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눈인사 정도는 나눴는데. 나도 미국에 살 만큼 살아서 인사한다고
계속 방해하지는 않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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