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같은 초등학교와 대학을 함께한 친구와 내가 양팔에 매달리자 기분이 좋은지 ‘나그네 설움’을 흥겹게 불렀다. 우리도 아버지의
음정에 맞춰 흥얼거리며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아버지는 이 친구와 내가 어릴 적 공유했던 고통을 모르는지 노랫가락은 흥겹게 잘도 넘어갔다.
초등학교
6학년 시작과 함께 담임 선생님의 지시로 반 전체 아이들이 각자 목공소에서 만든 회초리를 교실 벽 한쪽에 이름을 새겨 걸어 놓았다. 그 당시 최고 명문인 K 여중에 가기 위한 목표달성을 하지 못했을 경우의 회초리다. 매 맞다가 회초리가 부러지면 다시 목공소에서 만들어 와야 하는 것은 K 여중에 보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던 초등학교, 거기에서도 6학년 1반에 들어가 담임 선생님에게
매를 맞고 살아남은 아이는 그 학교에 입학이 보장될 정도로 유명한 선생이 있었다. 우선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맞았지만 여러 다른 이유로도 수없이 맞았다. 선생님의 핏기 오른 서슬 퍼런 모습은 섬뜩했다. 학교에 가서 또 맞을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하루하루가 암울하고 두려웠다.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인 어느 날, 침대에 누워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오른팔이 흔들리며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이상한 현상이 내 팔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또다시 팔이 앞뒤로 흔들렸다. 한 30초가량 흔들리다 멈추고 다시 흔들리고를 반복했다. 수시로 흔들리는 팔 때문에 나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엄마는 여기저기 용하다는 양의사, 한의사를 수소문하여 병을 고치러 다녔다. 그러나 의사들은 병명을 찾지 못했다.
흔들리는 팔로 6학년 반 학기만 다니고 집에서 놀았다. 생각만 해도 무서워 몸서리치던 선생을 보지 않으니 흔들리던 팔도 어느 날 갑자기 멈췄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간절히 원했던 k 여중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른 한쪽 팔에 매달려 걷는 친구는 나보다는
매집이 좋아 잘
견딘 덕분에 들어갔다.
친구는 주로 머리를 맞아 피딱지를 떼곤 했단다. 지금도 수시로 머리를 긁적거린다니. 좋았던 머리가 그 당시 충격으로 망가져 결국에 나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S 대학마저도 실패하고 2차 대학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아버지는 내가 최고가 아니어도 건강하게 살아 줘서 좋아하지 않는가. 나 자신도 최고가 아니기에 남보다 못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즐겁게 산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뒤에서 느긋이 바라보며 오늘도 정처 없는 이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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