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7, 2014

라면을 먹다가

"서걱서걱, 깍두기 씹는 소리가 너무 컸나?” 
옆방에서 낮잠 자다 눈을 비벼대며 깨어나온 남편의 눈치를 보며 한마디 하자 
소리도 소리지만 시큼한 깍두기 익는 냄새가 막걸리 양조장 같구먼.”

결혼 전 룸메이트와 살던 아파트에서 밥에 물을 말아 단무지를 열심히 씹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씹는 소리가 왜 이리 요란해요? 조용히 좀 먹을 수 없어요? 소리가 하도 커서 남자친구가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는 데는 너무 민망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기가 막혀서.” 
소리 지르고는 문을 꽝 닫았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야말로 너무 황당했다.

먹던 밥을 쓰레기통에 조용히 버리고 방에 들어와 숨죽이고 있었다. 인기척 소리에 문틈으로 내다보니 덩치가 거대한 남자가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갔다. 대낮에 그것도 외국 남자를 집에 들이는지는 전혀 몰랐던 일이다.

나야 단무지 씹을 때만 간간이 생각나는 사건으로 끝난 일이지만, 훤칠한 키에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친구가 당한 깍두기 사건은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혼자 밥을 먹어도 어느 정도 격식은 갖춰 먹어야지 밥상이 이게 뭐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밥에 물을 말아 깍두기만 놓고 먹는 밥상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내뱉은 남자친구 말 한마디에 내 친구의 자존심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너무 민망해 대꾸도 못 하고 먹던 음식을 싱크대에 버렸다며 
"혹시나 남자친구가 자기에 대해 실망했으면 어쩌지?" 
걱정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 아들로 친구의 밥 먹던 모습이 거슬렸던지 연락이 뜸하다가 결국엔 헤어졌다.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며 괴로워하던 그녀를 보며 
"그 정도의 일로도 정이 떨어진다니!"  
믿기지 않았다.

남편이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날, 나는 축 늘어져 나만의 시간을 즐기다 라면에 달걀 한 개를 넣고 끓인다. 냄비와 단무지를 티브이 앞 탁자에 놓고 냄비뚜껑에 뜨거운 라면을 담아 훌훌 불면서 신 나게 먹다가 갑자기 물에 잠기듯 옛 생각에 빠진다.

귀는 점점 커지는 무 토막 씹는 소리에, 눈은 TV에, 머리는 
"그렇게 고상한 그 둘은 지금 어디에선가 격식 갖춘 식탁에 앉아 우아하게 칼질하고 있을까?" 
생각한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히 피 멍울을 남길 뿐만 아니라 본인 가슴에도 남아 질책하며 괴로움에 살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상대방의 싫은 점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좋은 점은 아낌없이 칭찬해야지."
새해에는 다짐 해보지만, 요 주둥이가 내 의지를 거역하며 수시로 뱉어내니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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