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처럼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남자도 없다. 얼마간은 봐 주겠지. 그러다 아버지
밑에서 다른 형제들처럼 장사를 거들라고 하면 내 인생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른다. 불안감에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았다.
친구가 라디오 방송국 아나운서 지원을 한다기에 덩달아
나도 서류를 내밀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카메라에
얼굴을 이리저리 테스트하는 데는 아차 싶었다. TV 방송국도 아닌데.
잡지사에 응모했지만, 또 낙방. 결국엔 이도 저도 안 되어 대학원 지원으로 학생신분을 연장했다.
그냥 학교만 다니기에는 부모에게 면목이 없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신문을 뒤적거렸다. 최면술사가 쓴 원고 한 귀퉁이에 삽화를 그려 넣는 일자리를 구했다.
젊은 처자가 아무도 없는 산길을 가고
있었다. 홀로 가는 산길이 무서워 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자박자박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오며 저벅~저벅~.
겁이 난 처자가 획 뒤돌아보니 우람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는 호젓한 산길을 나란히 걷게 되었다. 처자가 걸음을 늦추면 남자도, 재촉하면 남자도,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인 남자가 무서워 처자는 안절부절못했다.
"저를 어찌하려고 그러지요?"
처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여전히 대꾸도 없이 걷기만 했다. 아무 대답 없는 남자가 더욱 무서워진 처녀는 또다시
"저를 어찌하려고 …?”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목소리로 잠잠히 걷고 있는 남자를 자극했다. 결국에 남자는 여자를 덮치게
된다. 애초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남자도 그녀의 지나친 자기방어본능에 그만 심리적 긴장이 커지며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처자는 아무 일 없이 산길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를 어찌하려고 하지요.' 가 ‘저를 사랑해 주세요.’로 심리적 갈등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직업을 찾았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바짝 긴장한 손님이 누워 있다. 최면술사의 낮고 나른한 음성이 이어진다. 누워있던 사람이 몸부림치며 내던 신음과 떨던 어두운 장면들, 직장을 잡지 못해 어두운 터널
속에서 헤매는 듯한 괴로웠던 시절이 가끔 또렷하게 기억의 저편에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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