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
황순원의 명작 ‘소나기’의 주인공인 소녀가 죽기 전에
말한 마지막 대목에서 눈물을 쏙 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니 많은 한국인이 아끼는 단편 소설 중의 한 구절이다.
얼마 전 지인의 오프닝에 갔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지닌 분위기가 있듯이 지인을 볼 때마다 ‘소나기’의 소년이 떠오른다. 소년이 자라서 어른이 된
모습이랄까? 아주 오래전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늙지 않은 순수한 모습 그대로다. 창가에 놓아둔 선인장이 몸집만 조금씩 바뀌어 변화된 모습을 눈치 못 채듯.
소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보며
'그날, 도랑을 건너면서 내가 업힌
일이 있지? 그때, 네 등에서 옮긴 물이다.’
소녀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소년이 실재 인물이라면 죽은 소녀를 가슴에 묻고 꺼내 되새기며 살아가지 않을까?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우리는 어릴
적 영롱한 눈빛과도 같은 순수함을 점점 잃어간다. 영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각자 삶의 가치관과 주어진 환경, 오랜 세월의 깨달음이 안에서 영글다 서서히 밖으로 묻어 나오기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 나도 윤 초시 댁 증손녀, 소나기에서의 소녀와 아주 흡사한 환경에서 자랐다. 항상 시름시름 앓아 핏기없는 얼굴에 가냘픈 몸으로 방학 때마다 시골에 보내져 개울가에서 물장난했다. 단지 개울둑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소년이 없었다는 것이 늘 아쉬웠지만.
소나기의 원래 제목은 ‘소녀’로 짧은 순간에 끝나버린 안타까운
순수한 사랑 이야기다. 구구절절한 묘사는 없지만 한번 읽고 나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사랑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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