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18, 2014

내가 왜 이렇게 됐니

내 걱정일랑 하지 마라. 너만 잘살면 된다. 네가 잘사는 것이 효도하는 거야. 내가 죽어도 나오지 마라. 난 원하는 대로 후회 없이 살았다. 더 무엇을 바라겠니. 남편에게 잘하고. 아이들 공부하고 싶을 때까지 돈 아끼지 말고 시켜라. 무엇보다 네가 하는 일 포기하지 말고.”
나에게 이야기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화장실 간다며 일어섰다. 아버지 돌보는 아줌마도 아버지의 급한 모습을 보고 뒤따라 나섰다. 여차하면 돌보는 이의 도움이 절대적인 상황까지 이른 모양이다.

그나마 먼젓번 서울 갔을 때만 해도 아버지와 마주 앉아 긴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지금 병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먹지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내가 왜 이렇게 됐니?” 
피식 미소를 짓는다
아버지는!” 
나는 웃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 근교 워커힐에서 조금 들어가는 아치울이라는 곳이다. 400여 년 친족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어릴 적 서당에서 글공부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셨다.

"맨해튼 사거리에 한나절만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만 봐도 세상 보는 눈이 뜨인다."
며 유학을 권했던 아버지도 고향 아치울를 떠나 서울로 그리고는 여비를 마련하느라 친구 자전거를 몰래 팔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들이 사라진 것을 안 할아버지가 자전거값을 물어 주긴 했지만, 아버지는 넓은 세상에 가야 눈을 떠서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길을 택했다.

잘 곳이 없어 우에노 공원에서 여러 날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밥에 기꼬만 간장만을 비벼 먹던 날도 수없이 많았다. 길도 익히고 도쿄의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려고 신문 배달로 시작한 고학 생활은 호텔 주방에서 일하며 힘들게 초급 대학을 마쳤다. 그 당시 힘든 기억으로 내 유학시절엔 
"아르바이트하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
며 부지런히 송금해주셨다.

이렇게 시작한 아버지의 인생은 본인이 살고 싶은 데로 원 없이 벌고 쓰고 사셨고 죽음도 멋지고 깨끗이 맞을 줄 알았는데. 인생의 마지막 만큼은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담당 의사 말로는
"평소에 좋은 음식 많이 드시고 오랜 세월 꾸준히 운동한 덕이라니!"
항상 자신감에 넘치고 밝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아버지는 누워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빨리 엄마 곁으로 가길 원한다. 수많은 조상이 잠들어 있는 선산 엄마 무덤 옆에 아버지 묻힐 곳을 준비했다.

아버지 비문에 뭐라고 쓸까?” 
내가 왜 이렇게 됐니? 라고 써라.” 
오래 살다 보면 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라는 버나드 쇼 묘비명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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