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온다. 이런 날엔 떠오르는 생각이 왜 이리도 많은지.
어디였더라? 뚝섬이었나?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한강 변을 우산도 없이 걸어 이태원까지 걸었다. 이제 그에 대한 기억은 짙은 안갯속으로 잠기듯 가물가물하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비가 뺨을 적시고, 쓰라린 가슴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발에서 빠져나가려는 젖은 신발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던 기억만이 선명하다.
얼마 전 빗속에서 차를 기다리며 내 시선을 잡던 여자, 내가 아는 남자와 함께 있던 여자다. 나는 이 여자를 볼 때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는다. 몇 번 본 여자임에도 함께 있는 남자가 볼 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헷갈린다. 바뀐 남자마다 낯설지 않기에 나의 시선은 항상 그 여자 주변에서 서성거린다. 그녀도 나를 의식하는
눈빛이었다.
신혼 초, 맨해튼 소호에서 룸메이트와 셋이 함께 살았다. 우리를 알고 지내던 온갖 사람들이 그곳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친구들만 들르는 것이 아니고
친구의 친구 그리고 여자 친구까지. 아예 뉴욕에 와서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때에 찌든
회색 소파에서 기거하던 사람들도 있다.
낡아빠진 커다란 스튜디오 한쪽 우리 침실 밑에 변변치
못한 부엌이 있었다. 빈손으로 오기 뭣하면 차이나타운에서
사 온 찬거리로 요리 실력을 발휘하던 여자들도 있다. 어둡고 을씨년스럽게 추운 그리고 조용할 날이 없던
삶에 지친 나는 시간만 나면 슬그머니 부엌 위 침실로 기어 올라갔다. 피곤한 몸을 옆으로 누이고 도마 소리에
맞춰 떠드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지금도 우리 룸메이트와 몇 번 만난 한 여자의 이야기가 귀에 생생하다. 내가 부엌 위 침실에 누워 있는 줄 모르는 여자가
옆에서 일을 거들던 우리 룸메이트에게 하는 소리다. 일식집에서 일한다는 이
여자 말이
"이수임은 밥맛 없게 생겼어. 소고기가 부위별로 맛이 다르듯이. 여자가 밥맛 없어."
내 흉을 보는 내용이었다. 그녀 말처럼 매력이 없는 나는 30년 가까이 한 남자와 질기게 살고 있다. 그렇게 넘치는 매력의 그녀는 우리 룸메이트에게 채었단 말인가!
얼마 전 빗속에서 시선을 마주친 그녀가 그 옛날 우리
룸메이트와 몇 번 만나다 채인 여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착각일까? 오래전 일이라서 선명하지는 않지만 쳐다보는 눈빛 하며 발산하는 분위기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도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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