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6, 2013

시작은 그럴싸했다

포도주 서너 병과 안줏거리를 차에 싣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이리저리 정처 없이 차를 몰고 목적 없이 달리다 어둑해 질 무렵 숙소를 찾아 들어가 마시는 한잔의 술맛이란!

홀랜드 터널을 지나 뉴저지로 들어갔다. 펜실베이니아를 거쳐 웨스트버지니아로 내려가 세난도 국립공원의 스카이라인을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숲 속의 모습이 별 감흥이 없다.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가을에 왔어야 하는데.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보며 숙소를 찾아 들어가야 했다. 한동안 샛길을 달리다 다행히 어둠이 깔리기 전, 숙소를 찾았다. 피곤한 몸을 술잔에 의지하고 행설수설 지껄이다 남편은 앉은 자세를 뒤로 누이더니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남쪽으로 계속 가겠다는 남편을 설득해 동쪽으로 달렸다. 해군사관 학교가 있는 버지니아 애나폴리스로 가는 도중에 워싱턴DC 알링턴국립묘지에 들렀다. 묘지를 구경하고 애나폴리스로 가는 고속도로를 찾아 들어가야 했는데 한 시간가량 같은 길을 돌고 또 돌아도 찾지 못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이 운전할 때 내비게이터가 된다. 진짜 내비게이터 하나 장만하자고 해도 남편은 절대 안 한다
그것 믿고 가다 눈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기사 못 봤어? 너무 전자 문명에 의지해 사는 거 좋은 게 아니야.” 
나가서 물어볼까?” 
운전하는 남편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대답이 없다
저기 세워봐 물어보게.” 
더욱 속력을 내서 달렸다.

오래전, 아는 선배와 함께 우리 차를 타고 지인의 집을 찾아가다 길을 잃어버렸다. 남편은 계속 달리기만 했다. 내가 물어본다고 하면 더욱더 화를 내며 속력을 내는 이상한 고집이 있다. 결국, 술판이 무르익고 일어설 즈음, 지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술판에 제대로 끼지 못해 화가 난 선배는 
내가 앞으로 네 차를 타면 사람이 아니다."
당시를 상기시키며 
그때도 그랬잖아. 왜 물어보지 못하게 하는 데?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차 세워.” 
길을 물어보지 않는 것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대한민국 남자들의 공통된 고질병이라더니.
남편은 끝까지 혼자 길을 찾아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옆에 탄 사람을 지치게 한다. 2시간이 되도록 빠져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니.

애나폴리스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차에서 내려서도 각자 걸었다골목 창가에 내어 놓은 꽃들로 장식된 파스텔 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너무도 로맨틱해 혼자 걷기에 슬펐다. 멀리 부둣가에 선술집,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의 파도가 나를 덮치듯 지치고 숨 막히게 했다.

왜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지? 한잔의 술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 내 고개는 비를 맞은 듯 숙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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