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신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도 아니고 넉넉히 용돈을 드리지도 못하는 내가 효도랍시고 하는 일이 있다. 주말에 전화해서 시어머니 이야기를 들어 드리는 거다. 나이 들면 방금 일어났던 일들은 순간순간 까먹지만, 옛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더니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항상 멀리멀리 옛일로 치닫는다.
“어느 해인가 으스스한
초겨울에 아비가 사는 뉴욕에 찾아갔었다. 낡아빠진 커다란 창고에서 돈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어찌나 측은한지 돌아오는 내내 비행기에서 울적했다.
왜 이 따듯한 LA를 두고 그 추운 데서 그림을 해야 한다는 건지 원. 결혼해서 그 창고에 사는 너를 친정엄마가 보고 갔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겠느냐! 그래서 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거다.”
긴 한숨을 토하신다.
“그럴 리가요. 워낙 몸이 약한 데다가 오랜 여행을 하셔서.”
미국에 살면 잘 살겠지 하는 희망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친정엄마는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 애지중지 키워 유학까지 보냈더니 결혼해서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그것도 룸메이트와
함께 살고 있으니. 캐나다 여행을 취소하고 가져온 비자금을 탈탈
털어주고 가셨다.
“내가 일
년 후 제대로 된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그때까지만 참고 살아라.”
오히려 나를 위로하던 엄마는 서울로 가자마자 바로 돌아가셨다. 친정엄마도 서울로 돌아가는 내내 비행기에서 울며 갔을 것이 분명하다.
“뉴욕 맨해튼에 이만한 스페이스, 이게
어디냐?”
그 옛날 일본 고학 시절 거처를 못 구해 동경 우에노 공원에서 며칠씩 노숙한 친정아버지는 낙담하는
엄마와는 달리 용기를 주셨다.
그림 그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혼했다는 어느 화가들의 무용담 같은 기사를 가끔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글쎄, 이혼까지 하면서…, 화가라는 직업으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림을 고집하며 딸린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부모 가슴을 후벼 팔 일일까?
누군들 그럴듯한 전시회에 연로한 부모를
초대해 효도하고 싶지 않겠는가? 젊은 시절 한때나마 화가가
되기를 꿈꾸셨던 시아버지는 화가의 길을 택한 아들의 희망을 꺾지 않고 서포트 해 주셨는데 남편의 큰 전시를 몇 달 남기고 돌아가셨다.
"우리네 인생은 학교를 마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한다. 자리가 잡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뭔가 멋진 미래가 가까이 올
것 같은 기대와 희망이 보일 즈음엔, 몸은 늙고 죽음은
가까이 와 있더구나."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던 시아버지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