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다운타운 그랜드 스트릿 스튜디오에 30대 초반의 남자 서너 명이 모였다. 여니 때 같으면 술이나 먹고 예술이나 논하다 갈 터인데 철이 들었는지 머리를 맞댄 심각한 얼굴이 보통 날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 미술 대학을 나와 그림을 그려 보겠다며 뉴욕을 떠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화가들이다. 변변한 직장을 구하는 것과 하등 쓸모없는 전공을 하다 보니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파트타임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들이다.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생활에 지쳤다나! 그렇다고 비즈니스 시작할 자금도 없다. ‘패들러를 하면 어떨까?’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내놓은 듯 흥분하며 떠들다 늘 그렇듯 술과 담배만 축내는 모임으로 끝났다.
“드디어 잡았다.”
그 모임이 끝난 며칠 후 남편이 느닷없이 빗자루를 내려놓으며 흥분된 어조로 목청을 높였다. 브로드웨이와 케널 스트릿 코너에
있던 도넛삽 앞에 노점상을 하기로 했단다. 눈이 휘둥그런 그리스계 도넛삽 주인과 합의하고 블라우스를 걸쳐놓을
전깃줄도 매고 길을 쓸고 오는 중이란다.
작업용으로 쓰던 박스에 고무바퀴를 달고 그 위에 캔버스용 천을 덮으니
그럴듯한 좌판대가 됐다. 이른 아침 인파를 헤치고 손수레를 밀고 스튜디오에서 서너 불럭 떨어진 현장에 도착했다. 선글라스에 모자를 푹 눌러 쓴 우리 또래의 한인 부부가 혹시나 같은 품목을 팔지나 않을까? 긴장하다 남편이 꺼내는 블라우스를 보더니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었다.
혼자 장사하던 남편은 어쩌다
잘나가는 품목이 떨어지면 주변에 평소 이야기를 주고받던 홈리스에게 품목을
적은 쪽지를 주고 몇 불럭 떨어진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배달시키곤 했다. 몇 푼 수고비를 쥐여주면 그는 신이 나서 리커스토어로 달려갔다.
“Check it out. Check it out.”
남편이 소리치다 길 건너 Pearl Paint 미술재료상을 찾는 지인들이 남편의 체면을 고려해 피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불러 세우곤 했다. 체면보다 화장실 가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한여름 몇 개월로 끝난 자영업(?)이었지만, 옆에서 장사하는 부부는 겨울엔
빌딩 사이에서 가속력이 붙는 브로드웨이 북남풍 추위에 몸을 녹이려고 교대로 도넛삽을 들락거리며 장사했다. 결국, 그 부부는 맨해튼 브로드웨이 한인 타운 도매상 주인이 되었다. 어쩌다 마주치면 서로의 지나간 설움을 리와인드 시키느라 묵묵히
한동안 눈물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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