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산업 혁명 당시 탄광 산업이 번창하면서 광부들은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지하 갱도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유독 가스에 노출된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는 순간 광부는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호황에는 가장 생명이 짧고 불황에는 제일 먼저
타격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우리 화가들이야말로 카나리아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경기호황 말기에 그림이 좀 팔리자 그동안 썼던 크레딧 카드빚을 갚았다. 카드빚을 다 갚고 똔돈이 모이기도 전에 불황이 닥치며 직격탄을 받았다.
대부분 화가의 처지가 고만고만하다. 그나마 우리는 아껴쓰며 살아 크레딧 카드빚이라도 청산했으니 다행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식들이 미술대학에 가겠다면
극구 반대했나 보다. 화가가 되겠다는 동기 동창들치고
부모와 싸우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부모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의사와 물리학 박사가 된 친구들이 있다.
수입이 불투명한 화가를 친구로 둔 이들은 본인들이 하고 싶어 했던 예술에 대한 아쉬움을 자주 화제로 삼는다.
이 친구들은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며 항상 바쁘다. 화가인 우리도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나마 스튜디오에서 9 to 5를 지키며 작업을 한다. 자유롭게 시간을 낼 수는 있어도 일정한 수입은 없다. 갑자기 큰 수입이 생기기도 하고 오랫동안 없을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찾아 다가가듯 불안한 삶을 산다. 탄광 속의 유독 가스가 언제 스며 나와 우리의 삶이
피폐해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불경기에 잘 버티고 있는 거야?”
“힘들지요. 그래도 화가로 산다는 게 좋아요."
어떡하겠는가 좋아서 택한 직업이고, 좋아서 놓지 못하는 붓인데, 한 손엔 붓을 잡고 다른 한 손엔 크레딧 카드를 들고 영광보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영광을
보지 못하고 끝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니. 아직 그들은 젊은 오기가
남아 있어 그림이라는 마약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솜사탕만 한 첫눈이 쏟아진다.
“우리 첫눈도
오고 하니 외식할까?”
일식집 앞 메뉴판를 들여다보며 아직도 떨쳐 버리지 못한 카드빚에 시달리던 시절의 기억들이 겹친다. 눈 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남편과 먹는 모처럼 만의 일식 맛이 새콤하다. 온 세상이 어둠 속에서 점점 하얘진다. 따끈한 정종이 들어가자 내 머릿속도
박하사탕처럼 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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