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될 수 없는 각각의 처지였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반에서 중간축에 들었는데 그 애는 항상 전교 탑이었다. 특히나 수학을 잘했다. 나는 수학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님에게 야단맞는 꿈을 요즘도 종종 꿀 정도로 수학을 못 했다.
그 애가 기차로 안양에서 등하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팔랑귀가 솔깃한 것이 시작이었다. 기차 차장 밖을 내다보는 흰 카라의 청색 교복을 입은 단정한 소녀를 상상하다가 나도 기차로 등하교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기차를 놓칠까 봐 부지런히 하교하던 그 애와 학교에서 떠들고 놀았던 기억도 별로 없다. 그런데 어쩌다가? 여고 시절 그 애의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곧바로 아버지가 숨겨 놓은 것을 꺼내기라도 한 듯 참한 아줌마와 재혼했다. 채 마르지도 않은 그 애의 엄마 무덤 앞에서 우리는 함께 서럽게 울었다. 나도 엄마가 늘 아파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 아마 같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서로의 입장이 같아서였나보다.
남편에게 말했다.
“작년 여름 우리 기차 타고 내리고 싶은 기차역에 내려서 7마일 정도 걸었을 때 빠진 뱃살이 도로 부풀었어. 줌바를 추면 그나마 줄기는 하는데 추고 나면 허리와 무릎이 아파. 내 여왕봉 친구 알지? 그 애는 남편과 함께 서울 시내를 샅샅이 걸어 다니며 둘러본다네. 뱃살이 붙어있을 틈이 없데. 멋지지 않아?”
오래전 여왕봉 친구가 LA에서 몇 년 살다 서울로 돌아간 적이 있다. 내가 LA를 방문했을 때 그 애를 여왕봉 다방에서 만났다. 남편은 나를 차로 다방까지 데려다주고 1시간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1시간이 10분으로 여겨질 정도로 후다닥 날아갔다. 이야기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남편이 다방 문 앞에서 시간을 보라는 듯 손목에다 검지 손가락질하며 나오라고 했다.
“1시간만 더 있으면 안 될까? 이야기 시작도 아직 못했는데. 제발 봐줘요.”
사정하고 돌아와 궁둥이를 붙이고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는 중 남편의 인상 쓴 큰 얼굴이 다시 다방 문 앞에 나타났다. 또 손목에 검지 손가락질하며 성질부렸다.
“뭔 수다를 2시간씩이나 떨어. 주차장을 찾지 못해 주위를 몇 바퀴나 돈줄 알아.”
가뜩이나 목청이 큰 남편의 꽥 지르는 소리에 친구는 놀라 당황한 얼굴로 그만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 연유로 그녀를 여왕봉여사라고 남편이 부른다. 친구는 그 이후 내가 다혈질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놀린다.
남편이 성질내며 추한 꼴로 죽 갔다면 참다가 싫으면 싹 돌아서는 나는 끝장을 봤을 것이다. 다행히도 남편은 ‘변해야 산다. 마누라 말 들었더니 자다가 떡이 생겼네’라며 못된 성질 누그러뜨렸다.
“내가 마누라 뱃살 책임지고 빼 줄게. 우리도 일요일마다 여왕봉 여사처럼 맨해튼을 싸질러 다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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