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7, 2016

초대하지 않은 손님

왜 찾아온다는 거예요? 부르지도 않은 남의 집에.” 

오프닝에서 한번 찾아뵐게요.’ 라는 누군가의 인사말을 듣던 어린 나이에 미국에 온 1.5세가 나에게 어눌한 한국말로 물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인사말이 일종의 친밀한 감정의 표현이라고 얼버무리려다. 아니 초대도 하지 않은 집에 왜 오겠다고 초대하라. 마라느냐!’ 1세인 나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좀 불러요.’라고 말하는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집은 보물창고라도 되는 듯 단단히 걸어 잠근다. 청소해야지. 음식 장만해야지. 손님 비위 맞춰야지. 등등 힘든 일은 하기 싫고 남의 집에 가서 한 끼 때우기는 쉽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늦잠자고 온종일 굶다가 빈손으로 나타나 배를 채우고 나면 바빠서 이만하며 사라지는 부류들리 적지 않다.

여러 번 초대를 받았으면 한 번이라도 부르던지, 초대하지 못할 사정이 있으면 부르라는 소리를 말든지.

그 많은 후배와 동료들을 초대하고 재워주다 부부 사이가 나빠진 이 선배님, 어떻게 그리 베풀 수 있었는지? 뭐 그럴싸한 집이라도 장만하시고 초대한 것도 아니다. 없는 살림에 음식 장만해서 먹이고 돌아가며 노래 부르라고 재촉하던 그분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다.

이 선배님뿐만 아니라 김 선생님, 배 선생님, 정 선생님에게도 여러 번 초대받았다. 그 보답으로 건강하고 화목하시라는 바람이 통했는지 모두 잘 계신다.

그런 정겨운 기억으로 나도 결혼하고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불렀다. 많을 경우엔 50명 이상이나.

그날 재미있었어요. 또 부르세요.’ 하던, ‘우리 집에도 한 번 오세요.’가 아니라 초대하면 기꺼이 가 줄 수 있다는 지인들의 소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몹시 거슬렸다. 그동안 나는 부르는 호구였구나? 하는 심술이 발동했다. 좀 불러요.’ 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이 들고 힘들어 이젠 못 해요.”라고 젊잖게 거절할까? 아니면 나이가 몇살인데 아직도 그런 말이나 하고 다니냐고?’고 심술부릴까? 망설이다 입을 꽉 다물고 못 들은 척한다그리고 부르는 요란한 해픈잉에서 발을 뺐다.

Friday, August 26, 2016

The uninvited guest

"Why are people coming in the uninvited place?” At the opening, my friend who came to the United States at a young age asked me in his awkward Korean accent when he listened to someone's greeting that "I'll visit your place"

In Korea, such greetings are said to be a kind of expression of intimate feelings. I also tilted my head while explaining it .

Most people who say, "Invite me," lock tightly as if their house is a treasure house. Clean it up. Make some food. It is because people don’t want to do the hard work and it is easy to go to eat the other person's house. Getting up lazily, starving all day and show up empty-handed. After filling up the stomach, there are a few classes that disappear, saying they are busy.

If you have been invited many times from me, why don’t you can invite me once? If there is something you cannot invite, do not tell me to invite you.

There was a senior Lee who became estranged from his wife while inviting many juniors and colleagues to rejoice. How could he do that? I would like to express my gratitude to him who gave us food and sheltered a few times, but he was already dead.

Not only Lee, but also Bae and kim have been invited me many times. It is good to know that the desire to be healthy and reconciled with the reward.

I used to invite people after I got married to such a memorable memory from time to time, more than 50 people.

'It was fun that day. Invite me again,” Instated of inviting me her house once'. It was very disturbing at some point when an acquaintance said. I have been an ‘inviting bastard’ in the meantime. A bad temper rose in. I pulled my foot out of the loud inviting.  

Now days, whenever I hear 'invite me.’ from acquaintances, I shut my mouth tightly and pretend not to hear.

Saturday, August 13, 2016

나이가 몇 살인데!

“너 남편한테 쥐여사니?” 
40년 만에 멀리서 뉴욕을 방문한 친구가 나에게 내뱉은 말이다.
너는 네 남편 눈치 보지 않아 그러고 사니?’ 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요 입이 
마음대로 살다가 얘 이혼당했잖아.” 
라고 옆에서 부지런히 밥 먹고 있는 또 다른 친구를 향해 화살이 날아갔다.

40년 만에 만난 세 여자가 그냥 헤어질 수 없었다. 이혼하고 혼자 사는 친구 집에서 하룻밤을 자며 밀린 수다를 떨었다
"우리 하루만 더 놀자."
친구들이 나를 붙잡길레 남편에게 전화했다
내일은 꼭 집에 간다니까. 한 번만 봐 줘요.” 
남편은 당장 오라고 소리를 꽥꽥 질렀다.

너 왜 그러고 사니? 네 남편이 왜 너를 믿지 못하는데? 너 남편에게 죄지었니?” 
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결국엔 옆에서 잠잠히 듣던 친구도 합세해서 합창했다.

처지를 바꿔서, 남편이 40년 만에 친구를 만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과연 기분이 좋을까?

중고등학교 시절 아침에 만원 버스를 타고 학교 가는 내가 안타까워 아버지는 나를 버스에 밀어 넣고 가며 지켜보시느라 앞에 전봇대가 있는지도 모르고 부딪칠 뻔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버스정류장에 나와 기다리셨다. 이태원 길가에 있던 웨스턴이라는 식당에서 크림 숲과 치킨을 사주시며 학교 이야기를 물어보곤 하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어느 독자가 말했듯이 신문에 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쓰네요.” 할 정도로 나는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3년 후 첫아이를 낳았다. 엄마에 대한 사랑이 아이에게로 옮겨갈 때까지 나는 엄마가 생각나면 훌쩍 되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편에게로 사랑이 옮겨가는 중이다남편이 나를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내가 남편에게 죄를 지어서도 아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일(친구들과 노는 일)보다는 옳은 일(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선택해야 했다.

엄마와 아버지의 사랑이 기억나면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 흘리다 마음이 따듯해지고 입가에 웃음이 번지며 힘이 솟는다. 그 사랑을 아이들과 남편에게 전달하며 살려고 애쓴다. 결국,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Friday, August 12, 2016

Right thing and good thing

"Do you live under your husband?" A friend of mine who visited New York from afar for the first time in 40 years spoke to me.

I wanted to say, 'You do not notice your husband, and do you?' But I kept my mouth shut. Then the arrow flew toward another friend who was eating diligently from the side, I am saying, “She was divorced when she lived her way.”

Three women I met in 40 years could not just break up. I slept through the night and had a chat with friends at a single friend’s house. "Let's play one more day." My friends grabbed me and I called my husband. "Tomorrow I will go home. Give a one more night to play with friends.” My husband yelled," Come right now. "

"Why do you live like that? Why does not your husband believe you? Did you sin against your husband? " Eventually, our friends who listened to our conversation quietly joined her to chorus.

In a different situation, would I feel good if my husband did not come home with friends for the first time in 40 years?

When I was in middle school, I was on a crowded bus in the morning. My dad pushed me into the bus and watched me. He almost ran into a telephone pole. He did not know that there was a pole in front of him. When I came back from school, he was waiting at the bus stop. At the Weston restaurant in Itaewon, he used to buy cream soup and fry chicken and ask about the school. There is no end to my father 's love. As one reader has said, "you write a lot of your father's story in the newspaper." I live with a memory of love for my mother and father.

I gave birth to my first child three years later after my mother died. Until my love for my mother moved to my child, And after my father died, love is being transferred to my husband.

Not because my husband does not believe me, nor because I have sinned against him. In order to keep the family, I had to choose the right thing (returning to the husband's home) rather than the good thing (playing with friends).

When I remember my mother and father 's love, my breasts become bigger, my tears become sicker, my heart becomes warmer, my laughter spreads and my strength grows. I try to live by passing the love on to my children and husband. After all, it’s because I am happy.

Saturday, August 6, 2016

버려진 쓰레기 찾아서

나이 들어 하는 여행이라 설까?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안갯속을 헤매다 나온 듯하다. 그나마 사진에 찍혀진 순서대로 훑다 보면 생각나긴 한다눈보다는 입이 더 기억을 잘한다. 먹었던 음식들의 맛과 색깔을 떠올리며 군침을 삼킬 정도다. 옆 사람들과 떠들었던 분위기도 생생하다.

라인 강 크루즈를 탔다. 강 배는 바다 배와는 달리 작아서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은 전혀 없었다. 배가 정박지에 도착하면 아침 투어를 하고 점심 후엔 동내 한 바퀴 돌듯 산책하고 돌아와 갑판에 누어 일광욕하다 저녁 식사 때 사람들과 떠드는 것이 일과다배가 작다 보니 사람들과의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다. 승객 190명 몽땅 미국인인 하얀 사람, 우리 부부만 누랬다. 그들도 우리의 존재가 불편했겠지만 어쩌겠는가! 조용히 남편과 식사하며 요리를 즐길 수 없는, 딱히 할 일 없는 배 안이라 식사 시간엔 모두 모여 한 식탁에서 떠들어야 했다. 영어가 영어인지라 불편은 했지만 견딜 만은 했다.

독일이 맥주로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햇볕이 잘 드는 라인 강가 야트막하게 펼쳐진 언덕은 화이트 와인 밭 천지였다. 와인 밭 언덕 위로 이따금 우뚝 솟은 옛 중세 성채 벽만 남은 성곽 위에 크레인을 세워 놓고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모든 것이 역사적 스토리 텔링에 굶주린 미국인 관광객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

혼자 여행 온 나이 든 남자가 있었다. 다리가 약간 불편한, 그의 선한 눈과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분은 항상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배에서 내려서는 쓰레기를 줍는 것이 아닌가! 세상 모든 쓰레기를 찾아서 여행하는 듯한 초연한 자세로, 미국생활에서 길든 강박관념의 한 토막을 보는 듯 쓰레기 줍는 그의 구부정한 모습이 진하게 새겨졌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등을 대는 순간 돼지우리라도 내 집이 편하다.’는 것을 누누이 느끼면서도 세상은 넓고 그 안에 사는 그 누구도 나와 같지 않기에 다름을 찾아서 또 여행을 떠나는가 보다.

Friday, August 5, 2016

Looking for something different

Is it an age-old trip? It seems that I wandered in the fog where I was going and what I was looking at. I think I can remind of them in the order in which they were photographed.

My mouth remembers better than my eyes. The atmosphere in which the taste and color of the food we ate with the people next to us is vivid.

I got on the Rhine cruise. The river ship, unlike the sea ship, was small and was no variety of entertainment programs at all. When the ship arrives at the marina, we take a morning tour, after lunch, we go for a walk in the town and go back to the deck to sunbathe. It is a lot to talk with people at dinner table.

As the river ship is small, there is a lot of contact with people, All 190 passengers were American, white, and only My husband I were Asian. They may have been uncomfortable with our existence, but what can we do! We could not enjoy the cooking with quiet meal. We were all in the middle of nowhere, so we had to get together at dinnertime and chat at the same table. It was inconvenient because as English is English, I felt uncomfortable but it was bearable.

I thought Germany was famous only as a beer, but the hill on the sunny bank of Rhine River were full of wine fields. An old medieval fort soaring above the winery hill and the restoration work is underway, with a crane erected over the wall of the fortress. It is clear that everything is aimed at American tourists who are hungry for historical storytelling.

There was an older man who traveled alone. I used to say hello every time I met his good eyes, whose legs were a little uncomfortable. He always carries plastic bags and picks up trash after getting off the ship! With his aloof attitude as if he was searching for all the trash in the world, his bent shape which looks like a piece of obsession that has grown in American life, was burnt deeply in my mind.

The moment I pulled my tired body back home and put my back on my bed, I realized that my home is comfortable even though it is hog pen. But since the world is wide and nobody is like me, I go on a trip to find something diffe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