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글렀다. 비 오는 날은 마냥 누워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아침은 나가서 먹자.’며 깨우는 남편 말을 듣고서야 일어나 주섬주섬 옷에 몸을 넣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서너 블럭 떨어진 다이너로 갔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감싸고 창밖을 내다봤다. 거리풍경이 스산하다.
대도시 일상에서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정지된 듯 표현한 화가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의 작품 속 여주인공처럼 한동안 앉아 있었다. 손님으로 꽉 찬 실내가 그의 그림 속 풍경과는
대조적이지만.
비 오는 날은 당연히 그냥 늘어져야 한다는 듯이 다시
침대로 들어가 앨리스 워커의 칼러 퍼플 (Alice Walker, The Color
Purple) 책을 폈다. 주인공 셀리가 하나님과 동생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셀리의 남편이 사랑한 셔그의 등장으로 셀리가 세상에 눈을 뜨며 지혜로워진다. 셀리의
사랑이 셔그를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매주 토요일 저녁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엘 갈까? 말까? 를 생각하느라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비가 그쳤다. 물기가 서서히 빠지는 공원의 맨땅을 밟는 것은 도시속의 또 다른 작은
상쾌함이다. 집에서 센추럴파크를 가로지르기만 하면 된다. 산책 차림으로
공원 96가 서쪽 입구로 들어가 호숫가를 끼고 돌아 89가와 5
애브뉴에 있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공짜로 들어가는 긴 줄은 미술관 옆면을 돌아 매디슨
애브뉴까지 이어졌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미술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품은 건성으로 훑으며 6층에서부터 천천히 빙빙 돌아내려 오니 밖은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찌해야 할까? 버스를 타고 갈까? 아니면
어두운 이 밤에 센추럴파크를 또 가로질러? 그동안 공원에서 발생했던 사고들을 떠올리며 어두운 숲 속을 들여다보니
새까만 동굴 속 같다. 저 멀리 한 커풀이 걸어가는 것 이외엔 아무도 없다. 그 커플을 따라잡아 함께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 나가 뛰던 실력으로 냅다 달리다
잰걸음으로 걸었다. 소곤거리며 다정하게 걷는 그들을
방해하기 싫어 조금 떨어져 천천히 따라 걸었건만, 거친 숨소리에 여자가 뒤돌아봤다. ‘너희 공원을 가로지를 거니?’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며 함께 가잔다.
어두운 숲 속에 숨어있던 바람이 나뭇잎에 매달린 물기를 터느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 젖은 풀잎은 상큼한 물풀 냄새를 뿜어댔다.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획 지나가는 느낌에 둘러봤지만,
우리 세 사람의 굵은 모래 섞인 산책로를 밟는 발걸음 소리만이 빛을 찾아 어둠을 뚫고 있었다.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비 뿌린 긴 하루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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