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9, 2013

오늘도 걷는다마는

오늘도오 걷는다마아는 정처 어업 바알~, 나온 자국마 눈물 오였~’

아버지는 같은 초등학교와 대학을 함께한 친구와 내가 양팔에 매달리자 기분이 좋은지 나그네 설움을 흥겹게 불렀다. 우리도 아버지의 음정에 맞춰 흥얼거리며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아버지는 친구와 내가 어릴 공유했던 고통을 모르는지 노랫가락은 흥겹게 잘도 넘어갔다.

초등학교 6학년 시작과 함께 담임 선생님의 지시로 전체 아이들이 각자 목공소에서 만든 회초리 교실 한쪽에 이름을 새겨 걸어 놓았다. 그 당시 최고 명문인 K 여중에 가기 위한 목표달성을 하지 못했을 경우의 회초리다. 맞다가 회초리가 부러지면 다시 목공소에서 만들어 와야 하는 것은 K 중에 보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던 초등학교, 거기에서도 6학년 1반에 들어가 담임 선생님에게 매를 맞고 살아남은 아이는 학교에 입학이 보장될 정도로 유명선생이 었다. 우선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맞았지만 여러 다른 이유로도 수없이 맞았다. 선생님의 핏기 오른 서슬 퍼런 모습은 섬뜩했다. 학교에 가서 또 맞을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하루하루가 암울하고 두려웠다.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인 어느 , 침대에 누워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오른팔이 흔들리며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이상한 현상이 내 팔에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또다시 팔이 앞뒤로 흔들렸다. 30초가량 흔들리다 멈추고 다시 흔들리고를 반복했다수시로 흔들리는 때문에 나는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엄마는 여기저기 용하다는 양의사, 한의사를 수소문하여 병을 고치러 다녔다. 그러나 의사들은 병명을 찾지 못했다.

흔들리는 6학년 학기만 다니고 집에서 놀았다. 생각만 해도 무서워 몸서리치던 선생을 보지 않으니 흔들리던 팔도 어느 갑자기 멈췄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간절히 원했던 k 여중에 가지 못했다그러나 아버지의 다른 한쪽 팔에 매달려 걷는 친구는 나보다는 매집이 좋아 견딘 덕분에 들어갔다. 친구는 주로 머리를 맞아 피딱지를 떼곤 했단다. 지금도 수시로 머리를 긁적거린다니. 좋았던 머리가 그 당시 충격으로 망가져 결국에 나는 아버지가 기대했던 S 대학마저도 실패하고 2차 대학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아버지는 내가 최고가 아니어도 건강하게 살아 줘서 좋아하지 않는가. 나 자신도 최고가 아니기에 남보다 못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즐겁게 산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뒤에서 느긋이 바라보며 오늘도 정처 없는 이 발길
.  

Friday, June 28, 2013

Even if I walk today

'Even though I walk today, the step are aimless. Tears welled up in every step that had passed.'

My father excitedly sang to see if my friend and I, who shared the same elementary school and college, felt good when I hung on both arms. We also hummed along the streets of Insa-dong to his father's tune. As if my father did not know the pain that this friend and I shared when we were young, so his tune was with joy.

There was a famous sixth grade teacher in a elementary in the middle of downtown Seoul. The student who was beaten and survived by the teacher was a well-known teacher who was guaranteed admission to a prestigious K girls' middle school. At the beginning of the sixth grade, the entire class made their own rods at the woodworks at the instruction the teacher. Then each of them was inscribed with their name on it and hung them on one side of the wall of the classroom. It was a rod to achieve goal to attend the prestigious K Girls' Middle School. It was up to my father, who wanted to send me the K girls' middle school that he had to make it again at wood shop if I was beaten and the whip broke.

First of all, I was beaten when my grades dropped, but for many other reasons. The teacher's fury figure was creepy. The nervousness of going to school and getting hit again made me gloomy and afraid of day by day.

One day near the end of the sixth grade summer vacation, I was in pain, thinking about going back to school. Suddenly the right arm was shaking and falls under the bed.  A strange phenomenon happened suddenly in my arms. Again my arms shook back and forth. It shook for about 30 seconds, then stopped, then shook again and again.

I couldn't go to school because of the frequent shaking of my arm. Surprised mother went to cure my illness by inquiring doctors and oriental medicine doctors who were useful here and there. However, doctors were unable to find the disease.

Because of the shaking arm, I only attended the sixth grade for half a semester. I played at home. I thought that I don't have to see a scary teacher, so my shaking arm stopped suddenly one day. Of course I couldn't get into the K school my father wanted so badly.

But my friend, who holds on the other arm of my father, entered the k school thanks to her better-beaten endurance than me. She used to get hit on the head and take off his a blood clot. I can't believe she's scratching her head from time to time. Her good head was damaged by the shock of the day and we ended up meeting again at secondary college after failing even the prestigious S university my father had expected.

Now my father is happy that I live a healthy life even if I'm not the best. Since I am not the best myself, I take it for granted and live happily every day. I walk aimlessly today, looking at those who are ahead.

Saturday, June 22, 2013

아이들과 함께 그린 정물화

막내 동서가 지내는 시아버지 제사와 차례를 모셔온 지 서너 해가 지났건만, 난 아직도 적응 못 하고 기일이 다가오면 허둥댄다.

이렇다 할 종교도 없고 제사를 꼭 모셔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지만, 멀리 떨어져 잘해드리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모셔왔다.

왜 제삿날마다 바쁜 일이 생기는지. 요번 제사는 토요일과 겹쳤다. 저녁에 춤추러 가야 하는데
춤추는 것이 더 중요해 아버지 제사보다?” 
절대 아니지. 제사가 더 중요하지요.”
시원하게 대답은 남편에게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아 시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너 편한 데로 돌아가신 전날 아무 시간 때나 해도 된다."
어머니도 나이 들고 힘이 빠지니 며느리 눈치를 보시는 게 마음이 짠했지만, 일단은 내가 바쁘니 일찍 지내기로 했다

평상시에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간단한 상차림에 생선전과 삼색 나물, 조기와 탕국은 끓였다. 장 봐 온 것을 풀며 탕국부터 안치고 생선을 잘라 놓으니 작은아이가 밀가루에 달걀을 묻히고 큰아이는 전을 부쳤다삼색 나물을 깨끗이 씻어 삶아 그릇에 담아 놓으니 작은아이가 볶았다. 전 부치는 것을 끝낸 큰애는 설거지, 나물을 끝낸 작은 아이는 과일을 닦아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았다. 남편은 커다란 상에 캔버스 천을 깔고, 아버님 사진을 정 가운데 세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웠다. 평상시 우리가 마시는 와인보다는 조금 비싼 것으로 준비도 했다. 그사이 조기는 마이크로 오븐에서 모양 좋게 구워졌다.

한 해에 여러 번 제사상을 차렸던 친정아버지한테서 들은 풍월은 있어, 상 차리는 아이들에게 홍동백서를 지시했다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이야.” 
캔버스 위에 그려진 멋진 정물화 한 폭의 제사상이 차려졌다
"완전 예술이야. 예술." 
한마디씩 하며 와인을 올리고 절을 하며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엄마, 왜 할아버지가 먹을 수도 없는데 상을 차려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너희에게 잘했니? 적어도 한 해에 한 번이라도 마음 깊이 할아버지에게 감사해야지. 훗날 너희는 제사 안 지내도 된다. 엄마 아빠는 아직도 한국 관습이 남아있고 하고 싶어서야.”

크리스마스 때마다 시아버지가 비행기 표를 보내와 우리 가족은 LA에 가서 연휴를 보냈다. 손주들과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을 달고 과자를 만들어 이웃에게 돌리곤 하셨다. 은퇴자금을 손주들 대학 학자금으로 만들어 등록금을 도와주셨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산타클로스였다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절해야지." 

유난히도 자주 내린 빗물 덕에 울창해진 뒤뜰로 놋그릇 종지에 향을 꽂느라 담았던 쌀을 흩뿌리니 새들이 재잘거리며 모여든다. 죽으면 과연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Friday, June 21, 2013

Still life painted together with children

It's been three or four years since I brought my father-in-law's memorial service from LA, but I still don't adjust and I'm flustered when anniversary of one's death approaches.

Even if I do not believe in religion, have doubts about the necessity of worshipping. However, I brought the memorial service to New York to please mother-in-law, who is far away from me and cannot do well.

Why do busy things happen on every sacrifice day? This service coincided with Saturday. I have to go dancing class in the evening. "Is it more important to dance than my father's sacrifice?" "The ritual is more important.” I answered my husband kindly, but I called my mother-in-law as I was not sure. "You can do it any time the day before." I decided to do early because I was busy.

With the simple table my father usually liked, I prepared tricolored greens, and fish and soup. The fish was washed and cut, and the younger son put an egg and flour on the fishes. The oldest son fried filleted fishes

I washed the vegetables, and the younger son stir-fried them. The older son, who finished fry, washed the dishes, and the younger son, who finished stir-fry the vegetables, wiped the fruit and put it in the plates. My husband laid canvas cloth on a large table, placed his father's picture in the center, lit candles and burned incense. I prepared something a little more expensive than our usual wine.

Because of that I heard from my father, who held the memorial service several times a year, I ordered the children to "Hongdong White Paper." "Red fruit is to the east the white fruit is to the west," a fine still-life painting on the canvas was set up table. "It's a complete art. Art.' One by one, we put up wine, bowed, and thought of father-in-law.

"Mom, why are we setting a table when grandpa can't even eat?" The children wondered at each rite. How well did grandpa do to you? "At least once a year, think deeply and say, 'Thanks grandpa.' You will not have to hold a memorial service. Mom and dad still have Korean customs and want to do it.”

My father-in-law sent me plane tickets every Christmas, so my family went to LA for the holidays. He used to decorate Christmas trees with his grandchildren and make cookies and give them to neighbors. He helped out with his tuition by turning his retirement fund into his grandchildren's college tuition. The grandfather the children remembered was Santa Claus. "If you have something you want to say to your grandfather, say like 'I'll do my best.'"

Due to the unusually frequent rainwater, the backyard was lush. I scattered the rice, which had been used to put incense in the bronze bowl, and the birds chirp and gather. Are we going back to nature when we die?

Saturday, June 15, 2013

변해야 산다.

며칠 전에 온 비가 또 쏟아진다. 이놈의 뉴욕 날씨하곤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니 찬거리가 없다. 든든하게 비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려고 무거운 대문을 당겼다. 세찬 바람결에 빗물이 튀겨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옷이 후줄근해졌다. 과연 저 험한 빗속을 뚫고 나가 찬거리를 사다 점심상을 차려야만 할까?

집안으로 도로 들어와 일단 멸칫국물을 우려내며 생각하기로 했다. 국수를 삶을까? 아무래도 비 오는 날엔 국수보다 수제비를 받아 든 남편의 표정이 환하겠지.

역시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감자 수제비를 받아든 남편은 군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신다. 기분 좋을 때를 틈타
오늘 저녁은 감잣국으로 하면 안 될까?” 
수제비 덩어리만 건져 먹고 대충 남은 감잣국을 먹는다면 저녁 끼니도 해결될 텐데짜증 낼 줄 알았는데
“Whatever.” 
하는 게 아닌가. 반찬 투정을 심하게 하던 남편이 변했다. 밥상 앞에서 잔소리해봤자 먹히지 않았던 투정이 어느 때부터인가 시름시름 멈춰 버린 것이다. 신문에 나간 남편의 반찬 투정에 대한 내 글을 읽고 반성했나?

아예 소설을 쓰시는군. 아무튼 잘도 지어내."
남편이 내가 쓴 신문에 난 글을 보고 자기에 대한 시답잖은 줄거리라도 비치면 소설이라며 한마디 한다
무슨 소설? 나도 쓰고 싶지만 쓸 능력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게 소설인데. 내가 언제 썼다는 거야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치는 기억을 살려내서 감정을 넣어 쓰기도 벅찬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지?" 
"전혀 내 기억에도 없는 이야기를 썼으니 소설이 아니고 뭐야." 
그렇게 삐딱하게 굴었잖아~ 그 기억을 쓴 건데. 기억 안 난다고? 사실이잖아?” 
나 그렇게 악랄한 사람 아니야.” 
절대 그런 적이 없다며 반박한다.
"그때 참을걸, 그때 잘할걸. 후회하지 말고 좋지 않은 습관 시원하게 훌훌 털어 버리고 변하면, 새롭고 넉넉한 세상이 당신을 반길 텐데. 좋지도 않은 습관 누구를 위해 백날 껴안고 살며 사람을 괴롭혀."

신문 지상에 남편 흉보는 것이 집안 망신인 줄 왜 모르겠느냐만, 신문에 난 내 글을 읽고 그럴듯하게 변해가는 남편을 보면, 집안 망신쯤이야. 일단 나부터 편하게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야.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데 많이 좋게 변했어. 훌륭해.” 
슬쩍 띄워 주며
어차피 맺어진 인연 오손도손 잘 살아보자고요.”
오랜 결혼생활 질기게 끌고 당기며 가는구나

Friday, June 14, 2013

Change is the way to live

It rains again.

There is nothing to eat in the refrigerator. I put on the raincoat firmly and pulled the heavy gate to leave the house. The strong wind caused rainwater to splatter before it could even go outside. Should I go through that heavy rain and buy the groceries and set up a lunch table?

I gave up going out. First of all, I decided to brew anchovy soup and think about what to prepare for lunch. Boil the noodles? Maybe on rainy days, my husband prefers sujebi to noodles.

As expected, my husband who eats a steaming potato sujebi feels good. Taking advantage of his good mood, I said, "Can we eat potato soup for dinner tonight?" If we ate the lump of sujebi and ate the roughly leftover potato soup, the dinner would be resolved.

I thought he'd be annoyed, but he'd said "Whatever." my husband, who had been very fussy about side dishes, has changed. Has he read my article in the newspaper about he's fussy about side dishes and reflected on it? "You wrote a novel about me," said my husband when he saw the article in my newspaper. "What novel? I want to write it, but I'm frustrated that I can't write it. When did I write it?"

How nice it would be to have the ability to write things that didn't exist. I can't even put my feelings in my writing. "You wrote a about me that I don't even remember." "You've been acting same as my articles. I wrote that memory. You don't remember?" "I'm not such a vicious person what you wrote about me," he retorted, "I've never did that."

If you regret the wrong you did to shake off your bad habits, a new and generous world will welcome you. Why bother me without breaking your bad habit?

I know it's a disgrace to the family to look down on my husband in the newspaper. But when he read my article in the newspaper and see him changing, I don't care a disgrace to my family. Don't you think I should live comfortably fi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