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아무개라고 말하는데도 누군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드디어는
“아아~ 혹시 복학생.”
키 크고 구부정했던, 수업시간에 등 뒤에서 딴 동료와 수군거리던 그 목소리가 기억났다.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인터넷으로 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죄짓고 숨어 살고 싶어도 그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구나.
“나 누구랑
결혼한 지 알아요?"
“알아.”
매우 반가워 나의 긴 수다가 펼쳐지려는 순간
“우리 만나서
예기하지.”
“왜? 지금 전화로 더 예기하면 안 되나?”
“좀 그래서.”
“그럼 내일 3시에 우리 집 어때요?”
졸업 후 만나지 못했던, 서울에서 온 옛 대학 남자 동기를 만난다니 갑자기 기운이 솟구쳤다. 부지런히 청소하고 이것저것 술안주도 준비했다. 시간이 다 되어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고 내다봐도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나 문밖에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서너 번. 4시가 다 되어 부인과 함께 나타났다. 대학 4년, 인생에서 너무도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고도 30여 년이 지났건만 서로의 형편을 다 알기라도 하는 듯 반가웠다.
식탁에 앉기가 무섭게 서울에 사는 동기 소식을 물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친구들도 자주 만나지 못했단다. 오히려 뉴욕에 사는 우리가 더 잘 알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해서,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친구 부인이
내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내가 영어로 말한 것도 아닌데 이상해서 물어봤다. 나이가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란다. 그래서 전화상으로도 이야기할 수 없었단다. 나는 그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문득 이 친구가 ‘알아는 들은 건지?’ 나는 맥이 풀리며
조용해졌다.
조용한 분위기를 반전하려는 듯
“지금도
수임이가 귀엽지만, 예전에도 귀여워서 인기가 좋았는데,
아무개 알아?”
그는 동기인 남편에게
물었다.
“누구?”
“수임이 따라다니던
덩치 큰 복학생?”
헌데, 이 친구가 이젠 눈도 나쁜가? 내일 모래 환갑인 내가 귀엽다니.
우리가 벌써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늙었단 말인가! 몸이 좋지 않아 술도 못 마신단다. 이가 성치 않아 고기도 먹기 어렵다. 기억이 희미해져 친구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만나기 전 기대감이
슬금슬금 맥이 풀려나갔다.
시력이 시원치 않아 내 모습이 안갯속의 여인네
모습처럼 보이기라도 하는지? 그야말로 요즘 용어로 뽀샾
기능이 작동해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자세히 볼 수 없어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서글펐다.
술판이 무르익을 초저녁 8시, 그는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일어났다. 그를 더는 잡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친구가 탄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무는 해를 보며 배웅했다. 그리고는
다시 식탁에 앉아 침묵 속에서 술을 마셨다. 이렇듯 시간은 흘러가는가! 술맛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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