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11, 2012

시어머니의 명주 이불

1984년 7말도 요즈음 날씨처럼 몹시 더웠다. 그런 찜통더위 속에서 결혼식을 해야 했는지

당시 6개월 전, 우리 부부는 뉴욕시청에서 혼인 서약만 했다. 남들처럼 번듯하게 혼례를 치르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양가 부모님 성화에 결혼식을 하러 시댁이 있는 LA로 끌려가듯 마지못해 갔다.

식장은 형님이 다니던 아담한 교회. 결혼 후 성경공부를 해서 세례를 받겠다는 목사님과의 약속하에 정해졌다. 드레스와 화장은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작은 시누이와 화가인 큰 시누이가, 사진과 꽃은 사진을 전공한 도련님이 맡았다. 케이크와 파티 음식은 알래스카 최북단 북극해 연안에 근무하시며 평생 서양음식을 만드신 시아버님이 와서 손수 준비하셨다. 난 그저 시집 식구들이 하라는 대로 하고 신혼여행만은 가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은 서른이 다 된 노처녀 딸이 시집가는 게 신이 났다. 커다란 이민 가방 두 개 가득 예단이라고 가져왔는데 무엇을 해 왔는지 볼 생각도 없이 나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뉴욕으로 돌아왔다.

결혼 28년을 살면서 그 커다란 두 개의 이민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는 시어머니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하나씩 알게 되었다.

주말마다 1시간 정도 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늘 당신이 살면서 겪었던 참혹한 장면들을 마치 활동사진처럼 들려준다. 그 단골 중 하나가 피난 가서 겪은 겨울 이야기다. 그것도 몹시 추웠던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린 딸이 죽어 눈 덮인 땅에 묻었단다. 묻고 오면서 뒤돌아 보니 당신 혼자 파신 언 땅이 깊지 않아 죽은 아이의 하얀 손발이 흙 밖으로 뻗어 나와 있더란다.
“어머니, 어찌 자식을 그렇게 묻고도 지금까지 살 수 있었어요?” 
“남은 자식도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찌하겠니. 머리통이 큰 아비(내 남편)를 낳다가 죽다 살아나 얼음을 깨고 냇가에서 기저귀 빨래를 하는데 손이 시려워서."
로 이어지는 여름보다는 겨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신 시어머니는 솜이불을 무척 좋아하신다.
“네 친정엄마가 예단으로 해온 명주 솜이불이 어찌나 따뜻한지 지금까지도 그 이불을 덮는다. 그렇게 좋은 솜은 내 생전에 본 적이 없다. , 가을용 모시 이불은 얼마나 고운지 아까워서 덮지 못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가 아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에 요즈음은 덮는다. 잠들기 전에 모시 이불에 놓은 수가 하도 고와서 들여다보고 또 본다. 여름 삼베 이불도 시원하니 너무 좋다.

밍크코트를 명품 백을 해 드린 것도 아닌데 내가 시집올 때 해온 이불을 품에 끼고 좋다고 하시는 시어머니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시집은 가긴 잘 갔군.’ 
서울에 계신 친정아버지도 
네가 서울에서 결혼했으면 돈 많이 깨졌다. 요즈음 세상에 예단을 그렇게 해가면 소박맞는다. 너의 시부모님이 워낙 욕심이 없고 점잖은 분들이라서 그렇지. 시부모님 잘 모셔라.”

아들만 둘인 내가 며느리 볼 때는 옛날 옛적 어디선가 예단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는 기억조차도 잊어버리련다. 둘이서 서로 도와가며 잘 살아만 준다면 그것이 예단이요, 효도라 생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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