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품어 감싸 안은 듯 푸근한 미소 띤 팽주 남편이
이 층으로 소리 없이 올라와서는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보온 통을 놓고 수줍은 듯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그를 우주라 부르고 그의 부인을 팽주라 부른다. 팽주란 차를 정성스럽게 다려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그간 쌓인 지난 여름날의 찐득거림을 씻어내기라도 하는
듯 비가 창을 내려친다. 아늑한 실내에서 바람결에 흔들며
막춤이라도 추는 듯한 비를 바라보며 팽주가 따라주는 차를 마신다. ‘더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일이 다 잊힌다.
팽주가 다미차를 따라주면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세
번에 나눠 마신다. 잔이 비면 다시 따라준다.
그녀가 준비한 코코넛 마카롱 또한 별미다. 비 오는 날, 고양이처럼 따뜻하고 편한 곳을 찾아 똬리 틀고 와인과 차를 홀짝이는 것이 딱 내 스타일이다.
팽주가 뭔지도 몰랐다. 코코넛 마카롱조차도 만들 줄 모른다. 그저 분위기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여류 한량이다. 속담에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며 한량이라는데, 한국말치고는
참!
게다가 오늘의 모임은 좋아하는 친구 몇 명과 함께
하는 ‘물풀’ 글 모임이다.
모임 이름처럼 물이 졸졸 흐르듯, 풀들이 바람결에 서로 비벼대며 속삭이듯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써 온 글을 읽으며 수다 하는 모임이니 한결 차 맛이 난다.
시간을 쫓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에 쫓기는 것인지 초조했던 어제의 내가 팽주가 건네준 잔을 들어 입 가까이 가져가면 차 향기에 시대를 거슬러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세월의 이끼를 잔뜩 머금은 오랜 절간의 동자승 닮은 팽주는 부드러운
눈을 잔에 고정하고 고운 손을 들어 천천히 빈 잔을 채운다. 차가 코에서 머물다 입으로 그리고 목젖을 스치며
돌아 내려가면 놓치지 않으려고 꽉 쥐고 있던 것들이 탁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왜 그리도 부질없는 것들에
집착했던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다음 모임엔 보이차란다. 우주님은 커다란 보온 통을 들어다 올려놓을 것이고 팽주님은 보이차를 내
잔에 고운 손으로 따라주겠지. 그날엔 제대로 다도를 눈여겨 볼참이다.
다도를 모르면 어떠하며
좋은 글을 쓰지 못하면 어떠하리
성황당 뒷담에 기대어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지듯
친구들과 얽혀져 보이차를 홀짝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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