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하기 위해 네다리를 핀으로 고정해 놓은 개구리가
허연 배를 불룩거리면서 몸체를 바둥거렸다. 눈을 가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향한 생물 선생님의 질책에 복도로 쫓겨났다. 교실 안을 기웃거리며 불안에 떨던 나는 생물 수업에 흥미를
잃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세상도 모르는데 지구 멀리
떨어진 우주를 공부한다는 것이 뿌연 안갯속을 헤매는 듯 확실치 않아 물리 시간도 꺼렸다. 파가 바뀔 적마다 반대파를 모조리 도륙 내는 당파싸움의 연속인 역사 시간은 질색이었다. 요즘도
이어지는 반대파 싸잡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로 시작한 성경 시간은 아예 멀리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해 불안해하는 꿈을 꿀 정도로
수학은 내가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었다. 암기 능력이 없던 내가
외국어 시간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러나 책 읽기를 즐겨 한번 붙들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국어 시간만은
늘 기다려지곤 했다.
음악 시간도 좋아했다. 불행히도 시원찮은 목소리를 대신해서 피아노 렛슨을 일 년 넘게 받았지만,
악보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하늘로 뻗은 손가락에 긴장을 풀라며 손등을 툭툭 치던
음악선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기하기를 권했다.
생각다 못한 아버지는 미술 선생을 찾아갔다. ‘딱히 소질이 있다기보다는 내 그림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는 선생 말에 렛슨을 시작했다. 친구들과 경복궁의 향원정을 그리려고 자리 잡는 나에게 선생님은
고궁 화장실을 가리켰다. 밝고 화사한
공간만 고집하지 말고 어둑하고 눅눅한 분위기를 화면에 넣어보라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아버지의 정성 어린 보살핌으로 미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여학교 졸업이나 했을지 모르겠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학교는 열심히
다녔다. 채플 시간엔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 그늘에 누워 소곤소곤 수다
떨다 혼났다.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어둑해질 때까지 십자가 놀이를 즐겼다. 십자 안에 있는 나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친구에게 맞서 버티다 교복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진 교복 팔을 휘두르며 깔깔거리고 떡볶이집으로 달려가곤 했으니.
특히나 생물 선생님이 정자와 난자를 설명하던 수업
중, 내 짝이 갑자기 “선생님,
정자와 난자는 어디서 살 수 있어요?” 하는 질문에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지.’ ‘그것도 몰라.’하는 투의
엉뚱한 나의 대답에 모두가 발을 구르며 배꼽을 잡고 웃던 수업시간만큼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불필요한 기억은 줄이라는데 옛일이 어제 일보다 더 선명히 꼬리를 물고 자꾸 떠오른다. 쓰잘데없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도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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