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아무도 이메일을 보내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왜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하려 드는가? 오래전 젊은 시절에도 누군가에게서 오지 않던 전화를 기다리곤 했듯이. 그 옛날 겪었던 기억의 흔적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의식의 한구석을 꼭 찍혀진 작은 점만큼으로 남아서인가.
그의 이름도 얼굴 모습도 이제는 기억에서 스멀스멀하지만,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조바심을 쳤던 여러 나날, 망설이다 용기 내어 어두운 방에서 들던 수화기, 귀찮다는 듯 받던 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했던 순간들만은 마치 엊그제 일인 양 또렷하다.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다.
“저….”
그가 말이 없다. 얼음기둥처럼 몸은 굳어지고 고드름 끝처럼 머리카락은 솟았다. 입술을 잔뜩 문 이를 간신히 떼어내고
“연락이 없어서….”
왜 내가 연락해야 하냐는 듯 별 반응이 없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요?”
“바빠서요.” 이쯤 해서 그만둬야 했는데.
“주말에 한번….”
“바쁜 일이 있어서.”
차가운 목소리로 더는 질질 끌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볼멘소리로
"네~"
상대의 수화기가 조용히 찰칵하더니 뚜뚜뚜.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난무하다 그와의 짧은 인연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꼈다.
‘씁쓸한 맛을 보고 정리돼야만 잊을 수 있다.’는 한때의 내 연애 지론은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연락을 끊은 그에게 전화했고 수화기를 놓는 순간 이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후련함이 밀려오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쉽게 잊힌 별 볼 일 없는 만남이 되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갑자기 싫어질 때가 있다. 어릴 적엔 치열하고 끈질기게 이유를 확인하곤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싫어서 보기 싫다는데. 돌아선 사람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되돌린들 오래 갈 관계일 리 없다.
고민하느라 밀린 잠을 몰아 자고 일어나 고개 숙여 잠깐 생각하다 머리채를 좌우로 서너 번 흔들고 나면 싫다는 사람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추운 겨울 찬바람 맞고 나면 봄이 오듯이. 살짝 미소 지으며 ‘우리는 이제 끝이야.’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람과 그 순간들이 쉽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다. 어차피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 이별도 서서히 다가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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