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나는 음식
만들기도 싫어한다. 그러나 집안 정리정돈 하는 것은 즐긴다. 깔끔한 공간에 앉아 뽀송뽀송한
빨래 개는 것을 특히나 좋아한다.
포근한 빨래를 만지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들 옷을 갤 때는 빠듯하게 살았던 지난날들이 떠오르고 남편
것은 남편대로 옛일에 젖어 든다.
동기동창인 남편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도 얼굴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마 다른 여자 동기생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섣부른 어떤 인연도 만들고 싶지 않아 시선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엮이면 피곤하고 힘들어지는
가난한 미술 전공하는 남자와의 인연을 그 누가 엮이고 싶었겠는가!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한 장면, 70년대 초 봄날 야유회를 위해 청량리 역전에 모이기로 한 날 몇몇 여학생이
운전사 딸린 자가용으로 도착하는 모습에 평소에도 남학생들의 빈한한 표정들이 더욱 눈 둘 곳을 몰라 난감해했다. 그렇듯 여자 동기 대부분은 넉넉하고 인물들도 멀끔해 기다렸다는 듯이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서두르곤 했다. 그러나 난 몇 번 중매쟁이를 통해 선본 남자들의 지랄 같은 요구 조건에 질려 때려치우고 유학을 선택했다.
혼기 놓치고 이 커다란 미국 땅 뉴욕에서 수업 시간에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동기를 만날 줄이야. 그것도 선배의 소개로.
‘결혼해? 말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못 하겠지? 결혼은 둘째치고
아이도 낳지 못하고 혼자서 늙어가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결혼하자고 적극성도 띠지 않는 남자에게 “결혼하자~” 고 했더니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안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각자 등록금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그나마 없이 시작하는
살림에 보탬이 되겠다는 현실적인 공감대가 작용했다. 물론 졸업 후에도 미루는 것을 윽박지르다시피 시티홀로
끌고 가 겨우 결혼했다.
치사하지만, 그 당시 내가 눈 낮추고 자존심 버리고 고개 숙여 결혼했으니 그나마 어릴
적 별명이 감자인 남편 밑에, 도토리 같은 큰아들과 밤톨 같은 작은 놈이 태어날 수 있었다.
물론 난 외로움도 모르고 현실적인 인간이라 결혼 못 하고도 ‘무자식이 상팔자다.’라며 잘 살겠지만, 내 양손을 잡은
아이들과 맨해튼을 걸을 때면 ‘자존심 버릴 때 과감히 버렸더니 요 알밤 같은 놈들을 얻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자존심만 붙들고 살아가겠지?’ 하며 씩 웃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엄마 뭐가 그렇게
좋아요.” 하고 아이들이 묻는다. “그런 게 있어. 자슥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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