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작업하는 남편을
둔 나는 하루에 세 번, 일 년이면 적어도 천 번은 밥상을 차렸다. 결혼 생활 30년으로 접어드니 삼만 번 정도 밥상을 차렸다고 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음식 맛이 없어 먹는 사람도 즐겁지는 않았겠지만, 시어머니 말씀이
“네가 음식 솜씨가
없어 아비가 그 나이 되도록 성인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갸도 큰 복이다.”
칭찬할 정도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나게 마켓을 보고 밥을 해서 남편에게
바쳤다. 그런데 일 년에 서너 번 그것도 조깅하고 집에 오는 길에 마켓에
들러 우유와 주스 그리고 달걀과 빵을 사자니 무거워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그 무거운 것을
수시로 들고 다녀도 되고 고귀한 본인은 안된단 말인가. 본인이 죄다 먹어치울 것임에도.
집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사자며 다섯 불럭 떨어진
신선하고 싼 물건이 많은 슈퍼마켓엔 들르지 않겠단다. 마켓을 지나치려는 찰나
다시 한 번,
"안 갈래?"
"어디?"
하는 게 아닌가. 걸어오면서 들르느냐 마느냐로
의견 충돌 중임에도 ‘어디?”라니 더는 할 말을 잃고 그냥 집으로 왔다. 혼자 들라는 것도 아니고 함께 나눠 들자는데도. ‘어디?’라니. 무거운 장바구니를 낑낑대며 들어 날러 삼만 번이나 해먹인 것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우소를 통해 죄다 싸질러 나가 없어졌으니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차만 몰고 나가면 사고를 내는 이 못난 나를 위해
차 타고 멀리 가야 하는 한국장이나 미국장은 함께 가주기는 한다. 신문이라면 미제, 국산 가리지 않고 환장하는 남편은 차 안에 앉아 신문을 보며 빨리 사 가지고
나오라고 성화를 했다. 마켓에만 들어가면 조바심이나 허둥대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조금만 지체하면 성질을 부렸다. 허둥대다 집에 오면 제대로 장을 보지 않아 빠진 품목으로 안타까워하며 다음 장 보러 갈 날만 기다리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고맙게도 마켓에 함께 들어와 도와줘서 조바심 병이 나아가는
중이다.
다른 남편들은 요리도 잘한다던데. 밥상을 차려 놓고 밥 먹자고 단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다면 내가 왜
이리 긴 하소연을 할까?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
"어디 가서 일 잘한다는 말 하지 마라. 부엌데기 된다."
던
돌아가신 엄마가 허구한 날 밥이나 해대는 내 곁에서 거들지도 못하고 빙빙 도는 듯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는 아니다. 태어나도 삼만 번 이상이나 밥을 해다 바쳤는데도 그닥 고마워하지 않은,
밥을 안 하면 얼굴이 소화 불량이라도 걸린 듯 어두워지는 남자의 마누라는 절대로 아니다.
다음 세상엔, 강이 보이는 드넓은 들판에 보일 듯 말듯 핀 잡초로 태어나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작은 풀잎이었으면 한다.
다음 세상엔, 강이 보이는 드넓은 들판에 보일 듯 말듯 핀 잡초로 태어나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작은 풀잎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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