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31, 2013

동쪽 끝 작은 마을

갑자기 삶이 멈춰진 공간 속에 놓인 듯 공허했다.

북적거리는 관광지를 벗어나 메인 주 US 1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캐나다 접경 해안지역, 미국에서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이스트포트(Eastport)까지. 안갯속의 작은 섬들은 언젠가 가 본 남해안 다도해를 연상시킨다.

인적없는 언덕진 타운 중심가에 들어서니 마치 서부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느낌이다. 전봇대와 드문드문 세워진 차량만 없앤다면 말이다버려지다시피한 몇몇 붉은 벽돌 빌딩들의 양식은 대부분 브루클린에서도 눈에 익은 같은 시기의 공공건물이다

바닷가 인접한 조그만 공원에 들어서니 수많은 여자 직원들이 하얀 유니폼 속에서 작업하는 바쁜 시절 모습의 옛 사진과 팻말에 적은 내용이 타운의 비애를 들려준다.

1875,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이곳에 처음 세워졌으며, 절정기에는 13개 회사가 북적거리며 번창했던 곳이다. 서서히 산업이 몰락하며 주민의 대량 이탈로 한적하고 맥빠진 포구로 전락한 모양이다. 마치 우리가 사는 이스트 강가를 끼고 있는 북부 브루클린의 옛 시절을 보는 듯했다남북전쟁으로 남부 대부분의 설탕 공장들이 폐허 되자 세계에서 가장 큰 설탕 공장이 윌리엄스버그 다리 밑에 자리 잡았다. 도미노 설탕으로 150여 년 동안 운영하다 2004년에 문을 닫았다. 최후의 마지막 남은 공룡이 숨을 거두 듯.

고색창연한 타원형 굴뚝 하며 세월의 때를 잔뜩 머금은 건물은 이제 또 다른 도약을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이곳은 수많은 창고 공장 건물들이 인기 있는 거주 지역으로 바뀌고 있지만, 동북쪽 끝에 자리 잡은 이스트포트는 정어리 산업 이후 대체 할 수 있는 묘안이 전혀 없는 모양새다.

관광객을 끌어들일 깨끗한 바다를 끼고 있지만, 불행히도 백사장이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래서인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숙소 베란다에서 마시는 술맛이 씁쓸하기만 했다.

바닷물에 콘크리트 기둥을 박고 서 있는 붉은 벽돌의 텅 빈 창고 건물에 다가섰다. 부서져 내리는 기둥 사이의 시커먼 공간에서 철석 이는 얕은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가 뒤섞여 묘한 울림이 들려온다.

그 옛날 번창하던 시절 타운의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세월에 묻혀 둔탁하게 들리는 듯하기도 하고 옛 시절을 아쉬워하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이 든 주민들의 깊은 시름의 한숨 같기도 하다

Friday, August 30, 2013

A small village on the east end

It was empty as if I had been placed in a space where life suddenly stopped.

Away from the bustling tourist destination, I drove along the US 1 Road in Maine to Eastport, the easternmost end of the United States near the Canadian border. The small islands in the fog remind me of the Dadohae on the South Korea coast that I once visited.

Entering the heart of the deserted hillside town, I felt like it's on a set of western movies. As long as the telephone pole and the sparsely built vehicle are removed. The styles of some abandoned red brick buildings are built the same period as those of Brooklyn.

Stepping into a small park by the sea, the old pictures and signs on the busy days of thousands of women working in white uniforms tell the sorrow of the town.

In 1875, the sardine-canning factory was first established here, and at the peak of time, thirteen companies flourished. The industry gradually has declined. And turned into a quiet and despondent port due to the mass exodus of residents. It was as if I were looking at the old days of northern Brooklyn, next to the East River where I lived. When most sugar factories in the south were destroyed by the Civil War, the world's largest sugar factory was located under the Williamsburg Bridge. It was shut down in 2004 after running it for more than 150 years with Domino sugar, like the last remaining dinosaur to die.

The building, with its colorful oval chimneys is waiting for another leap forward. Fortunately, in Brooklyn, many warehouse factory buildings are turning into popular residential areas, but Eastport, located at the end of the northeast, seems to have no alternative plan after the sardine industry. Although it has a clean sea to attract tourists, unfortunately, it is a pity that there is no white sand beach. Perhaps that's why the taste of alcohol I drank on the veranda of my lodging, where I could see the ocean, was bitter.

I approached the redbrick warehouse building standing with concrete pillars in the seawater. In the dark space between the broken pillars, a mixture of shallow wave sounds and seagull cries can be heard. It may be like a sigh of deep wretchedness of a few old people who miss the old days.

Saturday, August 24, 2013

씁쓸한 만남

! 기분 나빠. 서울에 있으면 대접받는 사람이라고. 뉴욕에서는 왜들 이러지?” 
안식년으로 뉴욕에 왔으니 서울에서 자기를 떠받들던 사람들 다리 죽 뻗고 편히 쉬고 있겠네.” 
내 입도 참을 수 없었는지 시큰둥하게 툭 뱉어냈다.  

오래전 유학시절 함께 하다 서울로 교수가 되어 떠나 한국에서 사회적 후한 대접에 익숙해진 지인이 뉴욕에 와서 한 투정이다아니 뉴욕에서 고생하며 유학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곳 생활을 뻔히 알면서 누가 누굴 대접해야 한단 말인가? 로마에 가면 로마식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서로가 다른 환경에 젖다 보니 모처럼 만나도 예전 같지 않다. 서울식, 뉴욕식 어느 쪽도 만족하지 않는다. 이곳저곳에서 수시로 몰려드는 방문객에게 치일 지경인데 안식년이라고, 여름 방학이라며 뉴욕에 와서들 연락하니 나 원 참그 옛날 허심탄회하게 하던 우스갯소리도 없어지고 옛 동기 앞에서 점잖을 빼며 목에 힘을 주는 만남을 굳이 내가 왜?

? 서울에 왔을 때 연락하지 않았어?” 
말들은 잘해요. 서울에 가면 한턱 운운하며 떠벌리지만, 막상 연락하면 외국 여행 중이었다며 얼버무리기나 하고.

오래전 맨해튼 그랜드 스트릿, 커다란 스튜디오 한쪽은 룸메이트가 쓰고 우리 부부는 다른 한쪽을 쓰며 살았다. 대학원 학위는 받았지만 변변한 직장을 구하는 것과 하등 쓸모없는 졸업장은 손에 쥐었다. 생계를 위해 남편은  브로드웨이와 케널 스트릿 코너에서 블라우스 장사를, 룸메이트는 크라이슬러 빌딩 거리에서 은빛 나는 핫도그 손수레를 놓고 새우롤을 튀겨 팔았다.

저녁마다 구겨진 돈을 피고, 앞뒤를 맞추며 우리 셋은 머리를 맞대고 시시덕거리며 돈을 세곤 했. 매상이 좋은 날은, 차이나타운에 가서 평상시에 먹던 음식에 워터크로스 접시를 얹어 먹으며 그날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떠들었. 비록 궁색한 생활이었지만 삶에 대한 열정은 한여름 땡볕만큼이나 뜨거운 시절이었다.

룸메이트가 팔던 새우롤을 사서 먹던 한 흑인이 반쯤 베어먹어도 새우가 나오지 않자 불평을 하더란다
“Keep eating. The shrimp will come out. (더 먹다 보면 새우가 나온다.)” 
고 했다는 룸메이트 말에 우리는 배를 잡고 발을 구르며 웃곤 했다
새우가 너무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 투덜거림이다
새우가 새우젓만 해서 ….’
정녕 우리는 그 당시의 풋풋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는 영 글러 버린 것인가?

Friday, August 23, 2013

A gloomy meeting

"Oh! I feel bad. I'm a person who is treated well in Seoul. What's wrong with New York?" "You came to New York for a sabbatical year, so the people who treat you well is resting and relaxing." I couldn't stand my mouth either, so I said bitterly at acquaintance's complains.

I met an acquaintance that became a professor in Seoul after earning a degree in New York. She kept complaining about her hospitality in New York, because she is getting accustomed to social hospitality in Korea.

I understand if she hasn’t studied in New York before, but she already knows the life style here and how to treat people each other. If you go to Rome, don't you think you have to follow the Roman style?

Our relationship is so different from each other that it is not the same as before. I'm run over by frequent visitors from here and there. They call me after coming to New York for sabbatical year and summer vacation. "Why? Didn't you call me when you came to Seoul?" They are good at that word. They brag about will treated me when I go to Seoul, but when I contact them, they say they were on a trip abroad.

A long time ago, our couple lived a large studio with a roommate in Grand Street, Manhattan. We got a graduate degree but couldn't find a decent job. It is a worthless diploma. We have to keep a living, so we sold Blouses on Broadway and the Canal Street section. Our roommate sold fried rolls of shrimp on a silver hot dog cart on the street in front of Chrysler Building.

The three of us used to face-to-face, flirting and counting money in the evening. On a good sales day, we went to the neighboring Chinatown and talked about the episode of the day, eating another plate of vegetable over my usual food. Although it was a poor life, the passion for life was as hot as the midsummer sun.

An African-American who bought a roll of shrimp sold by a roommate complained that there was no shrimp even if he ate half of it. “Keep eating. The shrimp will come out,” the roommate said to his customer. We used to grab our belly and roll our feet and laugh. It's a grumble that starts from too small a shrimp. 

Are we really can't gleaned back to the freshness of those days?

Saturday, August 17, 2013

소설을 쓰고 싶지만

여행가~.” 
?” 
소설 쓰려면 뭔가 경험해야지. 하고많은 날 집에만 있으니 소재가 있어야 글을 쓰지.” 
소설은 아무나 쓰나.” 
남편의 쓴소리에 컴퓨터를 켜고 어린 시절 내 가정교사 이름을 구글에서 찾아봤다. 없다. 이리저리 아무리 찾았지만, 아예 없다.

대학준비 시절, 아버지는 입주 가정교사를 들였다. 내로라하는 대학을 다니는 여자다. 작은 키에 허리는 잘록하고 머리는 뽀글뽀글 파마해 길게 엉덩이까지 늘어트려 보기만 해도 뒤돌아보게 하는 모습의 여자다잘 가르치기는 했지만, 허구한 날 공부 끝나면 밤늦도록 돌아다니다 새벽에 들어왔다. 푸릇푸릇 새싹이 움트고 봄바람이 불자 검은 망사 스타킹에 핫팬츠를 입고 남산에 바람 쐬러 나다녔다. 핫팬츠를 입고 걸어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어대곤 했다.

한겨울엔 속옷만 입은 위에 코트를 걸치고 다니지를 않나. 새벽에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아이고 추워라.” 
코트를 벗는 그녀의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어쩌다 함께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남자들이 눈을 휘둥거리며 돌아보고 용기 있는 남자들은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따라오면 나를 먼저 보내고 한참 후에나 들어오곤 했다.
왜 맨날 밤늦게 그러고 다녀요?” 
최고 학벌과는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이 너무도 이상해서 물어봤다
소설을 쓰려면 경험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러고 보니 그녀는 국문학 전공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삼류 통속 소설을 쓰려나!’

나도 남들처럼 소설을 쓰고 싶지만, 소설 하면 그녀가 생각난다. 그러나 나는 이야깃거리가 될만한 경험 부족으로 쓰기는 틀렸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태어나 시멘트로 지어진 성냥갑 같은 공간에서 자랐으니. 부모 말 잘 듣고 뉴욕에 와 결혼해서 남편 그늘 밑에서 아이 둘 낳고 평범하게 사는 내 머리에서 소설이 나올 리가 없다. 그렇다고 상상력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글 잘 쓰는 사람 대부분은 지방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자랐고 고달픈 삶 속에서도 많은 이웃과의 소통으로 남다른 성장 과정을 통해 생기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어린 시절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나는 끽해야 두 페이지가 한계다. 누구 말대로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라 하지 않는가!

소설을 쓰려면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며 오만 경험을 다 한 그녀가 과연 소설을 쓰긴 쓴 건가? 구글에 찾아봐도 없는 것을 보니 세상 경험만 하고 끝난 듯하다.

경험도 상상력도 없는 내가 우째 소설을 쓸까나? 올라가지 못할 나무에 오르려다 떨어지지나 말고 주변 정담이나 감칠 나게 써 봐야지. 소설은 무슨….

Friday, August 16, 2013

I'd like to write a novel, but

“Let's go on a trip.” “Another?” “I'll have to experience something to write a novel.  I'm only at home, so I need material to write."

“You can't write a novel?” I turned on the computer at the bitter sound of my husband. I tried to find my tutor's name on Google as a youth. None. No matter how tried find it.

When I preparing for college, my father hired a resident tutor. She is a woman who is short and has a thin waist and a curly long hair up to her hip.

She taught well, but after studying, she wandered late at night and came in at dawn. When the buds sprouted and the spring breeze blew, she used to go out with black pantyhose and hot pants. Men would whistle on her back walking in hot pants.

In winter, she wore a coat over her underwear. When I opened my eyes to the sound coming in at dawn, she revealed her inner skin as soon as she took off her coat. When we went out together, the men looked her back with their eyes wide open. Courageous men talked to her. When the man she liked followed her, she would send me first and come in long after.

"Why did you do that late every night?” I asked because she was so strange to be doing something that was acting out of line with her top educational background. "It's because I need a lot of experience to write a novel." Come to think of it, her dream was to become a famous novelist. Was she going to write a third-rate popular novel?

Whenever I want to write a novel, I think of her. I lack of the experience to be a subject of writing. I was born in the heart of downtown Seoul and grew up in a like matchbox built with cement. No novel can come out of my normal-life head, which well listened to my parents and came to New York and married have two children under my husband's shadow. Even more I have no imagination either.

Most of the writers were born in rural areas and grew up with nature, and even in the midst of a difficult life, there should be a childhood when communication with neighbors takes place. Who says literature is the product of suffering!

She said, "To write a novel, you have to have a lot of experience." Has she ever written a novel after all her a lot of experience? Seeing that there is no her name as a Google search, it seems that she has only experienced the world and ended?

How can I write a novel with no experience or imagination? Don't fall when I try to climb a tree that I can't climb. Try to write a good essay about my surroundings.

Saturday, August 10, 2013

삼만번 밥상 차린 여자

집에서 작업하는 남편을 둔 나는 하루에 세 번, 일 년이면 적어도 천 번은 밥상을 차렸다. 결혼 생활 30년으로 접어드니 삼만 번 정도 밥상을 차렸다고 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음식 맛이 없어 먹는 사람도 즐겁지는 않았겠지만, 시어머니 말씀이
네가 음식 솜씨가 없어 아비가 그 나이 되도록 성인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갸도 큰 복이다.” 
칭찬할 정도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나게 마켓을 보고 밥을 해서 남편에게 바쳤다. 그런데 일 년에 서너 번 그것도 조깅하고 집에 오는 길에 마켓에 들러 우유와 주스 그리고 달걀과 빵을 사자니 무거워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그 무거운 것을 수시로 들고 다녀도 되고 고귀한 본인은 안된단 말인가. 본인이 죄다 먹어치울 것임에도.

집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사자며 다섯 불럭 떨어진 신선하고 싼 물건이 많은 슈퍼마켓엔 들르지 않겠단다. 마켓을 지나치려는 찰나 다시 한 번
"안 갈래?"
"어디?"
하는 게 아닌가. 걸어오면서 들르느냐 마느냐로 의견 충돌 중임에도 어디?”라니 더는 할 말을 잃고 그냥 집으로 왔다혼자 들라는 것도 아니고 함께 나눠 들자는데도. ‘어디?’라니. 무거운 장바구니를 낑낑대며 들어 날러 삼만 번이나 해먹인 것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우소를 통해 죄다 싸질러 나가 없어졌으니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차만 몰고 나가면 사고를 내는 이 못난 나를 위해 차 타고 멀리 가야 하는 한국장이나 미국장은 함께 가주기는 한다. 신문이라면 미제, 국산 가리지 않고 환장하는 남편은 차 안에 앉아 신문을 보며 빨리 사 가지고 나오라고 성화를 했다. 마켓에만 들어가면 조바심이나 허둥대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조금만 지체하면 성질을 부렸다. 허둥대다 집에 오면 제대로 장을 보지 않아 빠진 품목으로 안타까워하며 다음 장 보러 갈 날만 기다리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 고맙게도 마켓에 함께 들어와 도와줘서 조바심 병이 나아가는 중이다.

다른 남편들은 요리도 잘한다던데. 밥상을 차려 놓고 밥 먹자고 단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다면 내가 왜 이리 긴 하소연을 할까?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
"어디 가서 일 잘한다는 말 하지 마라. 부엌데기 된다."
던 돌아가신 엄마가 허구한 날 밥이나 해대는 내 곁에서 거들지도 못하고 빙빙 도는 듯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는 아니다. 태어나도 삼만 번 이상이나 밥을 해다 바쳤는데도 그닥 고마워하지 않은, 밥을 안 하면 얼굴이 소화 불량이라도 걸린 듯 어두워지는 남자의 마누라는 절대로 아니다.

다음 세상엔, 강이 보이는 드넓은 들판에 보일 듯 말듯 핀 잡초로 태어나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작은 풀잎이었으면 한다.

Friday, August 9, 2013

A woman who set the table for thirty thousand times

Having a husband who works at home, I set the table three times a day, at least a thousand times a year. With 30 years of marriage, there is no denying that I have been set the table around thirty thousand times.

Of course, the food was not pleasant to the eater, but my mother-in-law praised me, saying, "You have no food skills, so my son did not get adult diseases so that he is old."

I'm sick and tired of thinking about it that I do grocery shopping. Only three or four times a year, on our way home after jogging, I asked my husband, "Can we stop by the market to buy milk, juice, eggs, and bread?" He said, "no," because he doesn't want carry heavy grocery. Then I have to carry the heavy thing around at any time and does he mean he doesn't have to do? Even though he eats almost everything.

The moment we pass the supermarket, I said, "Wouldn't you go?" "Where?" It is at the door of the market, which was divided over whether we should stop by or not. I lost my say-so and just came home.

I'm not asking you to carry them alone. I'm going to share them with you. The fact that I carried those heavy grocery shopping bags and set the table thirty thousand times is nothing, because those which my husband ate all gone through the bathroom without skipping a day.

For me who gets into a lot of accident every time I drive out, my husband often takes me to a Korean or American market. He sat in the car and reads newspaper while I was shopping grocery. Whenever I entered the market, I became impatient or flustered. When I came home, there were missing items because I didn’t shop properly. I waited for the day to go to the next market, but he rarely gave him a chance under the pretext of being busy.

Other husbands are good at cooking. If he ever set the table and asked me to eat once, why would I complain so long? "Don't tell someone that you're good at work. If you say so you become a kitchen maid." My late mother, who used to say, seems to be spinning beside me without any help.

If born again, not as a woman. I wish I could not be born as a wife of a man who did not thank me very much even though I has been cooking for him more than thirty thousand times.

In the next world, I hope I will be a small blade of grass that is born as a weed and falls in the wind in a wide field with a river view.

Saturday, August 3, 2013

말도 안 돼

잡고 가던 엄마 손을 갑자기 놓치고 길을 잃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말도 안 돼."
친구의 텍스팅이 들어왔다. 최월희 선생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갑자기 검은 물체가 얼굴을 확 덮쳐 숨이 막혀오는 느낌에 말도 안 돼.만 웅얼거렸다.

"James Joyce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다음 북클럽 모임에 읽고 가야 할 책)을 더는 못 읽겠어. 무엇을 붙들고 살아. 참으로 인격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지식의 겸손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해 주신 분이셨는데. 달력 보고 읽으며 이번 책은 제대로 읽고  공감하려는 희망에 부풀어 살았는데. 나의 마음에 선생님이 많이 차지하셨나 봐. 세상에서 헤어지기 싫은 사람이란 느낌 오랜만이야. 붙잡고 싶은데 나의 이기적인 생각일까? 선생님도 가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나 그냥 보내드릴 수 없어.’"
친구의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친구가 북클럽 선생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를 때 나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줍다 방구석에 멍하니 앉아 말도 안 돼.만 중얼거렸다. 아마도 친구가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슬퍼하니 그나마 침묵을 지킬 수 있었나 보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희미한 불빛을 보고 기뻐하는 찰나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다시 어두운 동굴의 끝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훤하게 타오르는 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재 속을 헤집으며 타다 남은 불씨를 애타게 찾으며 아쉬워하는, 갈 길을 잃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Being Artist)로 습관적인 삶에서 벗어나 무의식적 기억(involuntary memory)으로 삶을 재창조해야 한다. Bad and goodjudge(비판) 하지 말고 오픈마인드로 나 자신에서 벗어나 남들과 화합해야 한다." 
등등의 수많은 열정의 강의를 들었던 우리 회원 모두의 모습은 선생님을 닮아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북클럽 회원들마저 잃고 싶지는 않다. 다시 좋은 분을 모시고 싶다. 지식만이 풍부한 박사님이 아니라 학식과 겸손을 겸비한, 배운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가진 사람 가진 것이 없는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 낮은 사람에게도 fair (공정)한 분을, 큰소리 내는 제자들에게만 귀 기울이지 않고 작은 소리로 구석에 앉아 경청하는 제자에게도 따뜻한 눈길과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분을 모시고 북클럽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다.

최월희 선생님, 다음 세상에서도 그대의 제자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