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바빠? 아무리 바빠도 다 즐겁게 살자고 하는 일인데 몇 주 쉰다고 집안이 쪼개지는 것도 아니고 허구한 날 일만 하면 언제 이 넓은 세상을 볼 건데?”
밥도 하기 싫고 남편 얼굴 쳐다보며 밥 먹기도 싫은 것이 때가 됐나 보다. 마음 깊숙한 곳에 하루하루 쌓인 불만의 실타래 덩어리가 풀리듯 슬슬 화가 치밀어 올라오고 있다.
“이스탄불 갔다 그렇게 혼나고 와서도 또 간다고? 조금만 기다려 이번 일 끝나면 함께 가자.”
“만날 다음에 가자. 다음에. 다음은 우리에게 절대로 안 와.”
“갈려면 패키지로 안전하게 혼자 갔다 오던지.”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행사에 전화했다.
“사람은 알고 보면 다 좋은 사람입니다.”
선하게 생긴 가이드의 첫말로 프라하에서 동유럽 여행은 시작됐다.
“그래 맞는 말이지. 알고 보면 다 좋은 사람들이지.”
가이드 말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떡이는데 갑자기 핑하면서 어찔했다. 몸이 오슬오슬 떨리는 게 조짐이 좋지 않다. 밤새 타고 온 비행기를 아침에 내리자마자 시작한 겨울 여행이 무리였나 보다.
미열로 달아오른 게슴츠레한 작은 눈을 비비며 버스 창밖으로 보는 동구라파의 모습은 서구라파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았다. 여기도 성당, 저기도 성당 눈에 띄게 흥미를 일으키는 것이 없다. ‘그래도 여행사에 낸 돈이 얼만데 열심히 보고 기억해야지.’ 몸을 추스르며 머리를 쳐들고 돌릴 때마다 버스의 천장과 바닥이 겹쳐지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 심상치 않다. 살아 뉴욕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다행히 빈 좌석이 많은 버스 맨 뒷좌석으로 옮겨 누웠다. 남편 말을 들을걸. 집 나와 이게 웬 고생이란 말인가.
부다페스트,
TV 드라마 ‘아이리스’에 나온 이병헌이 묵었다는 호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 관광버스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송혜교가 호텔 로비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어 송혜교네!’ 희고 예쁜 얼굴에 미소를 띤 자그마한 몸매를 한 가이드가 송혜교로 보였던 것이다. 전날 ‘아이리스’ 촬영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인지 착각을 했나 보다. 아니면 고열 탓으로 인한 일루젼 현상인지? 아무튼 ‘송혜교가 걸어오는 줄 알았다.’라는 말에 신이 난 가이드는 서울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건네줬다. 역시 고국의 센 감기약은 나를 일으켰다.
남들은 여행 가서 들렸던 곳을 역사적으로 열거하며 즐거운 기행문을 쓰곤 하는데. 난, 왜? 여행할 때마다 우울한 기억을 하나씩 달고 다니는지. 집에 돌아와 여행지를 되돌아 보면 꿈속에서 스쳐 지나간 곳으로, 그것도 안개 낀 도시를 힐끔 지나친 정도로만 기억한다.
공황에 마중 나온 남편은 내 여행 백을 받아 끌며
“속이 확 풀어졌나?
이제 몇 달은 조용히 지나가겠군. 된장찌개 끓여 놨으니 밥이나 먹자구.”
살면서 명치에 쌓인 화의 실타래 덩어리가 풀리기 시작할 때면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 ‘어디로 갈까? 어디가 좋지?’ 하며 여행지를 알아보며 화를 삭인다. 여행사에 예약하느라 힘들어 실타래는 더 커지지만. 그 커진 실타래를 슬슬 풀며 여기저기를 생각 없이 기웃거리다 오는 것이다. 여행 후엔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기다리는 남편 덕에 실타래를 감고 풀고를 반복하며 짧지 않은 결혼 생활을 그럴듯하게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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