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1, 2019

이별 그 후

발걸음이 무겁다. 가슴이 횅하다. 예전처럼 두리번거리지 않고 텅 빈 공원을 천천히 걷는다. 저 언덕 위에서 손을 흔들고 나타나 함께 걷던 친구가 얼마 전 이사 갔기 때문이다. 함께 산책하며 나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떠났다. 남겨진다는 것이 이렇게 허전할 줄이야.

그녀는 지금쯤 짐을 풀고 새로운 동네에 적응하느라 바쁘리라. 혼자 조용히 거닐던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친구가 된 것처럼 그 상큼한 붙임성으로 벌써 누군가에게 다가가 워싱턴 스퀘어를 걷고 있지나 않을지? 친구는 멀리 간 것이 아니고 NYU 근처로 이사 갔다. 떠나간 그녀는 젊은이들로 활기찬 공원을 산책하고 남겨진 나는 나이 든 사람이 많은 산책로에서 서성거린다.

내가 걷는 리버사이드 팍은 지리산 자락처럼 허드슨강을 끼고 지루하고 길게 이어지는 단순한 공원이다. 이곳의 그런 매력에 끌려 걷다가도 누군가를 기다리듯 멍하니 강을 보고 앉아있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그녀와의 만남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 주어진 듯 소중했다. 만날 약속이 없는 날도 혹시나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기대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둘러봐도 소용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더 쓸쓸하게 한다.

학창시절, 지리산 산행을 안내하던 남미 사람처럼 땅땅하고 다부진, 햇볕에 그을은 중년 남자가 생각난다. 그는 우리를 전라도 남원에서 시작해 구례에서 끝나는 산행을 안내했다. 저녁이면 모닥불 가에 모여 떠드는 우리를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 잠들 시간이 되면, 불 속에 묻어 달궈진 큼직한 돌을 낡은 군용 텐트 안으로 끌고 들어가던 그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적적해 보였다.

그는 어디서 무얼 하며 살다 산중에 들어와 산삼을 찾아다니다 틈틈이 산행을 안내하게 됐는지? 그 남자의 삶이 궁금했다. 그러나 궁금증을 묻기에 나는 너무 숫기가 없었고 친구들과 재잘거리기에 바빴다. 우리는 산행을 마치고 떠나는 사람으로 바쁘고 화려한 서울로, 남겨진 그는 어둡고 눅눅한 숲속으로 향했다. 그의 어눌한 뒷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남겨진다는 것은 떠나는 것보다 무척이나 안쓰러운 일이다.

친구가 이사 간 계절이 그나마 움츠렸던 겨울이 지나고 화사한 봄날이라 다행이다. 함께 걷던 그녀가 떠난 자리에 새 생명이 소생하고 수선화가 얼굴을 내민다. 나뭇가지가 파릇파릇 봉오리를 옹기종기 싹을 틔운다. 망토를 두른 도도한 여인네 같은 튤립들도 목을 곳곳이 세우고 봄을 반긴다. 따사로운 봄 공기에 화들짝 핀 벚꽃이 수줍은 듯  방실거린다. 세상이 갑자기 환해 보인다.

복식호흡을 하며 코끝에 느끼는 숨에 집중하고 걷는다.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망상이 사라진다. 새소리가 더욱 낭랑하게 들린다. 함께 걷는 것도 즐겁지만 혼자 걷는 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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