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색이 영 아닌데. 너무 안 좋아. 뉴욕에 돌아가면 종합
검진 한번 해보지.”
전시회 관계로 남편과 서부여행 중에 호텔에서 깊이 곯아떨어진 나를 술집으로 불러낸 내과 의사인 친구 남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말이다.
“며칠 잠을 설쳐서 그렇지 딱히 고장 난 데는 없어요.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우리 남편 말 들어. 큰 병 만들지 말고. 달리 의사야.”
들어가 쉬라는 말도 없이 부부가 합작으로 기죽이듯 겁을 줬다.
그렇게 큰 병이라면 청진기라도 대주든지 여행으로
피곤한 사람 붙들어 앉혀 놓고 극구 사양하는 술을 따라주며 하는 소리라니. 박차고 일어나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켜 앉아 술을 마셔야 하는
고통이란! 그래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의사 앞에서
쓰러질 테니 알아서 하겠지.
뉴욕으로 돌아와 과연 병원을 가야 하나 걱정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와중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에
갔었느냐고.’ 가지 않았다니까 심각하게 가기를 권했다. 죽을 병이라도 걸린 건가 하는 조바심으로 검진을 받은 결과 빈혈이 심하다는 진단으로 철분을 조제 받았다. 그러나 빈혈이라는 진단을 믿지 못하고 내 몸의 한 부분이 망가진 건 아닌가? 하며 슬슬 고장이 날 만한 나이에 접어들기도 했다고 슬쩍 넘기다가도 불안감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실명을 꼭 그렇게 신문에 언급해야 할 이유가 있었나?”
신문에 쓴 내 글을 읽고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친구가 한마디 툭 던진다.
“무명으로 쓰지
않고 실명을 잘못 쓰면 소송당할 수 있다는 것 몰라.”
오랜 세월 소송의 천국인 미국에 살면서 누가 송사에 얽힌 소리만 해도 신 나던 세상이 갑자기 하얘진다. 짙은 와사비를 삼켜 머리통이 날아갈 듯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 숨이 탁 막힌다.
내 몸 어딘가가 슬금슬금 거덜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사가 아니라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송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도 변호사가 아니라서 불안하다. 이런 감정들이 막연한 이민객의 피할 수 없는 잠재적 불안함의 발로인지도 모르겠지만. 딱히 소송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 그냥 세상 사는 일에 기운이 빠졌다고나 할까. 어릴 적엔, 사람들을 만나 충고를 듣고 잘못된 점을 되돌아보기도 하며 나름대로 좋은 방향으로 바꿨지만, 나이가 드니 진심 어린 충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에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다.
친정아버지 말이 ‘나이 들수록 고집부리지
말고 젊은 사람과 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다리가 부서질 정도로 매사 앞뒤 돌다리를
두들겨 보듯 살라는 건지? 그 끝이 어딘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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