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낭만의 시절이라고 일컫는 70년대, 내가 염원했던 남자를 서너
번 만나자마자 버림받았다.
장사꾼 아버지를 둔 나와 교수 아버지를 둔 그와의 사회적 인식의 틈을 메꿀 수 없어 헛소리를 한 나의 잘못으로. 그 내용은 차마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다.
장사꾼 아버지를 둔 나와 교수 아버지를 둔 그와의 사회적 인식의 틈을 메꿀 수 없어 헛소리를 한 나의 잘못으로. 그 내용은 차마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다.
비가 억세게 내리던 날, 그에게 잘못을 구했으나 그는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
고 했다. 푸른색 옷이 빗물에 푹 젖어 검은색으로
변할 때까지 빗속에 서 있었다.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그를 빨리 잊기 위해 나를 가장 혹사하는 방법으로 70년대 마이클 잭슨의 아프로 스타일로 머리를 또 볶았다.
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 이후 단 한 번도 머리를
볶지 않았다. 그러나 미장원 주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머리를 맡겨도 괜찮겠다는 느낌에 확 저질렀다. 그녀는 내 얼굴이 작아서 잘 어울릴 거라며 머리를 말기 시작했다.
어릴 적 뽀글 머리에 덮인 그런대로 귀여웠던 내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에 가득 차 끝나기를 기다렸다.
작은 얼굴을 폭 덮은 뽀글 머리에 뿔테 안경을 끼고
청바지에 쑥색 코듀로이(corduroy) 재킷을 입고 미팅에 나가면 적어도 퇴짜 맞는 일은 없었다. 어두컴컴한 다방에 앉아 턱을 괴고 수심에 찬 모습으로 남학생들의 길고도 지루한 개똥철학을 잘도 들어주곤 했기 때문인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지만, 긴장 속에 항상 정신을 곤두세우고 꽉 막힌 머리구조로 살아가는 내가 너무
싫다. 예전처럼 머리 외부가 변하면 내부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볶았다고도 할 수 있다.
나를 버리고 미쳐야 그럴듯한 발상에 근거한 새로움이 나오지
않을까?
헤르만 헤세의 ‘나르시스와 골드문트’에서 골드문트처럼
집을 떠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방황하고 싶다. 고정된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 헤매며 온 힘을 예술에 불사르고 싶다. 그러나 그럴수 없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뭔가 나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내가 한 짓이라고는 고작 미장원을 찾아간 것이다.
"머리가 잘 나왔어요."
미장원 주인이 들이미는 거울을
차마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확 스치는 찬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진부한 머리채를 바람에 날려 버리듯 마구 흔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아무도 없는 집에 와 자세히 거울을 들여다봤다. 머리칼은 변했는데 내 머릿속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늘상적인 평범함으로는 안된다.
달라져야 한다. 변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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