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23분, 길 건너편 건물에도 나처럼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있다. 불이 훤하게 켜져 있다. 나는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 하고 새벽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남편은 크루즈를 타고
가는 느낌이라는 엉뚱한 소리나 지껄이고.
30년 만에 맨해튼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혼하면서 살 곳을 마련하지 못해 맨해튼 소호에서 남편의 룸메이트와 셋이 살았다. 치솟는 렌트로 룸메이트는 서울로 우리는 저렴한 거처를 찾았다.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그린포인트 이스트 강가 끝 공장 건물에 똬리를
튼 것이 정확하게 30년 전이다.
"한번 사대문을 떠나면 사대문
안으로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
친정아버지가 중구 남산동을 떠나 이태원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뱉던 푸념이다.
"한번 맨해튼을 떠나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
나도 아버지처럼 중얼거리며 살았다.
아이들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를 무척 좋아한다. 물론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라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들도
힙스터(Hipster)인 양 폼 잡고 젊음을 즐기느라 신이 나서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잡으면 집을 떠날 줄 알았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 밥해 주기 싫은 내가 떠날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아무리 불러도 대꾸하지 않다가도 아이들이
부르면 생선이 도마 위에서 튀듯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세상 모든 소리가 ‘엄마~’로 들렸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나의 젊음과 에너지를 쏟았고 정든 보금자리까지 내 줬다.
그린포인트에 젊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개발한다고
주위가 어수선해서 언젠가는 떠나려고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 하며 최선을 다해 남은 삶을 자유롭게 살고 싶다. 물론 남편과 말이다.
“한국 음식 먹고 싶으면 와라.”
“엄마 길 건널 때 차 조심해요. 바쁘다고 아무 데서나 막 건너지 말고요.”
어릴 때 아이들에게 했던 잔소리를 요즈음 내가 듣고 산다. 저희 눈에는 맨해튼 큰길을
헤매는 조그만 엄마가 걱정스러운지 조심하라고 잔소리하고 야단도 친다. 길 건널 때는 손도 잡아주면서.
"너희나 잘 살아라. 대학 등록금까지 다 대 줬으니 더 이상은 없다. 결혼도 알아서 하고 나는 그저 결혼식 하객으로나 갈란다. 나중에 아이 낳아 지지고 볶든 말든 아예
키워 달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마라. 너희 키운 것으로 땡이다."
너희 인생이 소중한 만큼 엄마 아빠의 인생도 소중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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