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했다. 쳐다보기는커녕
모른척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손을 번쩍 들어 웃으며
인사했는데. 오늘부터 우울증 무드로 들어섰나?
어제만 해도 동네가 떠내려가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굳모닝’ 하더니.
동네 길에서 마주치는 알고 지내는 그 사람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황당한 하루를 시작할 수가 있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면 슬쩍 피하려 했는데
반가워하며 허그를 하길레 살짝 안겼다 풀려났다. 다시 조증(mania)으로 돌아왔구나!
살면서 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서너 명 만났다. 첫 번 경험은 대학 시절로 전혀 경험이 없던 시절이라 고생 좀 했다.
대학 4학년 봄 학기가 시작될 무렵, 키가
크고, 멀쩡하게 생긴 남학생이 복학했다. 그는 내가 좋다며 따라다녔다. 키 작고, 예쁘지도 않은 나와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가 않는
한 쌍의 그림이다. 여름 내내 따라다니던 그가 가을이 되자 아는 척도 안 하고 바삐 지나쳤다. 아마 새로운 여자가 생겨 이제는 나에게 흥미를 잃었나?
다음 해 초여름 어느 날, 살이 피둥피둥 올라 덩치가 더 커진 그를 우리 집 앞에서 마주쳤다. 할 말이 있어서 나를 기다렸단다. 그 할 말이라는 것이
‘결혼’,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울 내내 아는 척도
않더니 갑자기 나타나 결혼을 하자니. 사귀던 여자와 잘
안되어 화풀이로 나를 잡으려는구나.
그는 매일 우리 집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다방으로 데려갔다.
"적을 잡으려면 숲에 숨어서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때를 기다려야지 이렇게 전면 공격을 하면 더욱더 멀리 도망가지 않겠는가. 일단 후퇴를 하고 기회를 기다리게나."
충고했다.
아버지의 충고가 먹혀들었는지 그의 모습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고 밖에 나가려던 어느 날 나는 놀래 기절할뻔했다. 그가 아예 집 앞에 진을 치고 친구와 교대로 나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또한 찾아왔다.뜻밖에 그의 누나에게 들은 소리는 동생이 ‘조울증 환자’란다. 곧 병원에 입원시킬 테니 입원비를 마련할 동안만 기다려 달라는 애절한 부탁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누가 나를 그리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건 이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여러 해를 걸치며 그것도 사계절을 통해 심리 상태를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조울증 증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는 사람도 있지만, 더 자주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파도 타듯 잘 피해 다녀야 한다. 그들과 엉키기 시작하면 삶이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다행히도 작년에 뉴욕에 다녀간 동기의 의하면 조증에 나를 따라다니고 우울증엔 나 몰라라
했던 그가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니며 잘살고 있단다. 듣듯 중 반가운 소리다. 그러나 난 아직도 꿈속에서
우리 집 앞에 서성거리는 그를 보면 놀라 도망치다 혼잣말을 하며 깬다.
"꿈이야. 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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