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라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게 된다. 엉뚱한 기차를 탔을지라도 실망하지 않고 기다리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곳에 도착한다. 오히려 그 낯선 여정에서 소중한 인연을 만나 더 나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한다. 기차에 오르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비록 기차를 놓쳤을지라도, 다음 기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서울에 살던 시절, 나는 무척이나 결혼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도 작고 몸도 약했던 나에게 선뜻 다가오는 남자는 없었다. 중매쟁이를 통해 만난 의사 쪽에서는 내가 아파트 한 채는 얹어야 저울추가 평행해진다며 노골적으로 아파트를 요구했다. “너 아파트 한 채 얹어서 그 의사와 결혼할래? 아니면 그 돈으로 유학을 갈래?” 아버지는 내 진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심각한 얼굴로 물으셨다. “유학 갈래요.”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키 큰 미국 사람들은 키 같은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한다. 미국에 네 짝이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아냐. 결혼을 못 한들 어떠냐, 자유롭게 살아라.”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롱아일랜드에 있는 아델파이 대학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미국에서 맞이한 첫 추수감사절, 사나흘 동안 그치지 않고 눈이 내렸다.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고, 학교 식당마저 문을 닫았다. 미처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사흘을 꼬박 굶은 뒤에야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나 집에 돌아갈래요. 도저히 여기서 못 살겠어요.” “그래라. 당장은 눈 때문에 못 오니, 눈이 그치거든 돌아오너라.” 신기하게도 눈이 그치고 밥을 먹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등록금도 냈는데 한 학기는 마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뉴욕 생활이 견디기 힘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돌아가겠다고 울먹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늘 다정하게 달래주셨다. “그래, 정 힘들면 돌아와야지. 그런데 너 뉴욕까지 갔으면서 맨해튼에는 가봤니? 주말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해도 배울 점이 참 많단다. 맨해튼 구경은 제대로 하고 돌아와야지.”
그 길로 맨해튼 한복판을 쏘다니다 센트럴파크에 들어섰다. 호숫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자연을 만끽하며 삶을 즐기는 그들을 보며, 나도 저들처럼 자유롭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랐다. 결국 나는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미루고, 학교를 맨해튼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공부를 빨리 마치고 돌아오라고 재촉하지 않으셨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응석을 부릴 때마다, 오히려 내가 뉴욕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은근하게 이끌며 마음을 안심시켜 주셨다. 비록 서울에서 '결혼'이라는 안전한 기차를 타지 못해 멀고 험한 길을 돌아오며 고생하긴 했지만, 결국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문득 옆에서 꾸벅꾸벅 조고 있는 남편을 바라본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아름다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