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경에 잠에서 깬다.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눕거나 아니면 글을 쓴다. 이런저런 생각이 샘물처럼 솟는다. 그중
하나를 끄집어내 다듬고 글쓰기에 좋은 시간이다.
펜을 들기 전, 유튜브에서 ‘집에서 걷기’
비디오를 틀어놓는다. 가르치는 여자가 어찌나 요란하게 덜거덕거리는 달구지처럼 쉬지
않고 떠드는지 볼륨을 낮춘다. 새벽에 가볍게 할 수 있는 운동이라 따라 하지만,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밖을 향한다.
코너 유닛에 사는 내가 북쪽 건물을 쳐다보면 창문을
통해 샤워하는 여자가 보인다. 선명한 몸매가 차츰 내부 뜨거운
김에 가려 뿌연 모습으로 어른거린다. 샤워 후, 욕조를 닦는 포즈는
낯익다.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가 즐겨 소재로 삼은 여인의 누드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녀의 욕실 불이 꺼지면 나의 시선은 잠깐 머뭇거리다 창가에서 떨어진다.
따뜻한 날, 서쪽 맞은편 건물에 사는 여자는 창문을 올리고 샤워한다.
샤워 후엔 햇빛에 가슴을 내놓고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햇볕째는 여자를 감상하는 듯하다. 나도 그녀처럼 벗고 햇볕을 쬐고 싶지만, 차마 못 하고 비키니 차림으로 방안을 서성거린다.
학창시절 순간순간 포즈를 바꾸는 누드모델의 모습을
즉시 포착해 스케치북에 빠른 속도로 옮기는 이른바 크로키를 수도 없이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자들이 벗은 모습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내 시선을 끄는 것은 우리 집
부엌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는 집 부엌 장면이다.
동양 남자가 부엌에서 저녁 준비하느라 냉장고 문을
여닫고 오븐 앞에 서서 지지고 볶는다. 몸을 숙였다 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부지런히 움직인다. 남자가 저녁상을 차려 놓으면 여자가 등장한다. 둘은 마주 앉아 식사한다. 남자는 나처럼 부엌 쪽에 앉아 밥 먹다가 수시로 일어난다.
설거지하는지 한참을 둘이 붙어 서 있다가는 불이 꺼진다. 갑자기 삶이 정지된 듯
그 집 창안 풍경이 적막해진다.
검은 티셔츠를 입고 음식을 만드는 그 남자는 날렵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짝사랑한 검정 터틀넥을 자주 입던 남자의 얼굴로 상상한다. 다 차려 놓은 밥상을
향해 걸어 나오는 꽃무늬 파자마를 입은 퉁퉁한 여자는 내가 싫어하는 친구의 얼굴로 상상한다. 나와는 달리
부엌을 들락거리지 않는 그 여자가 내심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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