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20, 2017

23년 전 5월

1984년부터 우리 부부는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 살았다

가까운 이웃으로 자나 깨나 함께 했던 화가 정찬승 선배님이 1994년 암 치료하러 서울에 가셨다. 가기 전날 비행기 놓칠까 봐 걱정이라며 나보고 공항 가는 시간 늦지 않게 전화해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달 후인 그해 5월 나도 서울과 제주도에 개인전을 하러 갔다. 마침 서울에 계신 정 선배님에게 전화했다
수임아 나 지금 병원 가려는 중이야. 좀 괜찮아지면 갤러리에 들를게. 전시회 잘해라.” 
아파서 간신히 힘들여 내뱉은 선배님의 목소리가 마지막일 줄이야!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급하게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그 선배가 그려서 준 손바닥만 한 자화상이 하얀 벽에 말없이 걸려있다.

그해와 같은 5월이라서일까? 올봄 개인전을 준비하며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땅을 뚫고 따스한 봄날 작은 꽃잎을 껴안은 새싹이 돋아나듯 정찬승 선배와 같은 동네에 살며 함께했던 끈적끈적한 인연들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잠이 무척 많았다. 엄마는 일어나지 않는 나를 이불에 둘둘 말아 윗목에 놓고는 했다. 특히 아이 낳고는 더욱 잠이 쏟아져 아이 끼고 자는 것이 일과였던 어느 날
여보세요.” 
잠든 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정 선배가 
너 자고 있냐?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 남편이 장모가 둘이 될지도 모르는데 정신 차려~” 
선배님하고 함께 있는 것 아니에요?” 
나는 벌써 집에 왔다. 지금 네 남편이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어떤 여자와 붙어서 사이좋게 시시덕거리고 있어. , 일어나” 
내 남편과 함께 놀다 뭔가 수틀리면 나를 깨우곤 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한잔하자고. 김치 가져오라고.’ 전화하셨다.

1994 내 오프닝에 회복하시고 오실 줄 알았던 정 선배님은 오시지 못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던 뉴욕에 사시는 변종권 선배님이 갑자기 나타셨다. 본인도 전시회 하러 서울에 오셨다면서변종권 선배님에게 이번 전시회 카탈로그와 카드를 보내며 몇자 적었다. 선배님 생각나세요? 서울에서 하던 제 오프닝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저를 놀라게 하신 거요. 안타깝게도 정찬승 선배님은 결국 오시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와! 그 편지 받고서 어찌 오프닝에 달려오지 않을 수 있겠냐.'
라며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아무리 바쁘고 험한 세상을 사는 우리지만 옛정이 통할 때는 마음속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숨어있던 정이 봄날 노란 민들레 꽃이 쏙 고개를 쳐들듯 눈시울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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