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 이거 정말 오랜만이네!
몇 번 전화했었는데 불통입디다. 혹시 집안에 변고가 생겼나 해서….
두 분 잘 지내시지요?”
“우리야 뭐 변함없는 박물관 피스니까.”
맨해튼으로 거처를 옮기고 30여 년간 같은 번호였던 전화도 없앴다. 우리 부부가 ‘갈라선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한 질문에 뭐 그냥 잘 지내고 있다는 남편의 대답이었다.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별거 아니면? 이혼? 아닌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예전에도 남편이 서울에서 강의한다고 1년간 떨어져 지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왜 아빠가 집에 오지 않냐?’며 서툰 한글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몇몇 지인들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이혼했냐?’고도 물었다. 하물며 이웃 히스패닉 남자도
남편이 근 일 년이나 보이지 않으니 뒤뜰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죽 내밀면서 추근대기도 했다.
아무튼, 사람들 마음속에는 한때나마 인연을 맺었던 상대를 미움, 고마움 혹은 그리움 등등으로 기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편과 전화 통화한 이 지인은 내 마음속에
고마움으로 기억되는 분으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저녁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한때
뉴욕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화가들이 몰리는 슬럼지역을 마치 창공에서 사나운 매가 먹이를 꿰차듯 벼락투자를 해 재미 봤다. 그도 항상 주변에 들끓든
화가, 패션디자인 그리고 음악인들의 사소한 아이디어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담아두었다가 자신의 예술적 감각으로 버무려 사업을 시도해 성공한 사람이다. 또한, 주위의 어려운 사람에게 항상 베푸는, 그의 별명이 ‘밥사’라던가? 각박한 뉴욕에서 얼마나 훈기가 넘치는 별칭인가.
이혼남인 그가 여러 명이 함께 하는 우리 저녁 초대에 “와이프와 동행해도 되나?” 고 물었단다.
재혼했나? 누굴까? 몹시 궁금했다.
주위가 훤해진다 싶더니 그가 건강하고 활달한 모습으로
‘이형~’ 하고 나타났다.
그 옆에 낯익은 듯한 와이프와 함께.
“어디선가 뵌 것 같은데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차분한 분위기를 띤 그야말로 염화시중의 미소만 지었다.
“어디서 뵀더라?”
남편에게 물었다.
“보긴 뭘 봐.
S 그룹 회장 사모님이 나타난 줄 알았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며 괴로워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고 맞는 사람 만나 삶을 재창조해야 함을 밝은 표정의 그를 보며 절실히 느꼈다.
“우리 결혼생활은 행복한 거야?”
물어보며 남편을 쳐다봤다. 대답이 없다. 한참을 뜸 들이다
“뭐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야지 어쩌겠어. 박물관 피스(pieces)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