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달달 떠는 발레가 뭐가
좋다고 갑자기 간다고 난리야. 나 원 참”
한국장엘 가지 않아 김치 먹어 본 지가 꽤 됐다. 이렇게 춥고 눈 쌓인 겨울엔 묵은 김치찌개와 김, 송송 썬 파를 곁들인 명란젓을 얹은 따뜻한 흰 쌀밥이 먹고 싶다.
마침 남편이 차이나타운 근처에 갈 일이 생겨 김칫거리를
사려고 따라나섰다.
“눈도 펄펄 오고 이왕 나왔으니
우리 이스트 빌리지 근처 일식집에 갈까?”
“사시미에 따끈한 정종 좋지.”
깔끔한 일식집에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칼칼한 목젖을 싸악 적시는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링컨센터 티켓이 생길 때마다 전화하는 친구가 발레
티켓이 있다며 만나자는 전화다. 김칫거리와 일식집은 다음에도
갈 수 있지만, 발레는 오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차 좀 돌려요.”
자고 나면 일주일이 후딱. 그리고 일 년이 후딱. 스치는 인연처럼
가던 세월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다 어느 해부턴가 번개 치듯 눈 깜박할 사이 사라진다. 누구 말마따나
60대에는 60마일 70대에는
70마일 속도로 시간이 간다. 할 일은 많은데 머리와 몸이 원하는 만큼 따라주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니 아쉬울 수밖에. 아침에 일어나 작업할라치면
어둑어둑 지는 해가 커튼을 치듯 창밖에 떡하니 와 있다. ‘오늘도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서운함에 ‘오늘 해야 하는 일, 찾아온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상상하는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달달 떠는 환상적인 발레가 아니었다. 무대 밑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한눈에 보이는 가장 앞좌석이기도 했지만, 내 눈엔 의상 배경 율동이 현대 미술관에 들어서며 컨템퍼러리 미니멀
아트(단순함을 강조하는 현대 미술)를 감상하는 듯했다.
휴식 시간에 고개를 돌려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곱게 차려입고 나온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풍요로운 조상 덕에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 듯 예술에 조예가 깊어 종종 찾아다니며 보고 느끼는 그들의 문화생활이 부럽다.
미국에 살면서 아쉬운 것이 이민자들이 보는 수박 겉핥기식
미국문화가 아닌 그들 고유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늘 마음 한구석에서 맴돌며 한국 남편과 살아 이들의 생활과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점이다. 그렇다고 30년 넘게 살아준 고마운 남편을 바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만약 남편의 배반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악다구니 쓰며 울고불고 난리 치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리라.
모국의 우리 세대에 유행한다는 억지 춘향 로맨티시스트처럼 외국인과 연애하며 그들의 문화와 생활을 배우고
느끼며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졌는데 Why not? 글쎄,
늙어서 될까 모르겠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