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8, 2015

역전에서

엄마, Shake Shack (셰이크 섹) 햄버거 먹고 싶어. 

일본에 가 있는 작은 아이가 스카이프로 엄지와 검지로 작다는 표현을 동그랗게 그리며 일본 음식은 양이 너무 쪼잔해서 먹고 나도 배가 부르지 않고 허전하다고 했다. 먼젓번에는 베이글이 먹고 싶다더니.

어떡하니? 햄버거를 보내 줄 수도 없고 그냥 그곳에 있는 것 먹고 적응하며 살아야지. 

내 생전 소포라는 것을 보낸 적이 없다. 없으면 없는 데로 사는 곳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고 주장이다. 물건을 사서 부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귀찮고 머리가 뻐근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이 쓰리고 아리다. 아이 대신 햄버거를 먹어볼까 해서 여러 군데 있는 셰이크 섹 중 그랜드센트럴 역 지점으로 갔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는 연민을 끌어내는 곳이 터미널 아닌가영화 'Falling in love (폴링 러브), Unfaithful (언페이스풀)에서 기차를 타고 다니다 사랑에 빠진 불륜의 배경인 그랜드센트럴 역, 주인공들이 만나기 위해 즉 바람피우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며 애타게 오가는 기차역.

사춘기 시절 나는 평생 아파 누워 있는 엄마, 그로 인한 친정아버지의 바람으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버지 엄마를 자꾸 힘들게 하면 나갈 거야
"어디로 갈 건데?" 
기찻길을 따라 멀리 남쪽으로. 
훌쩍이면서 가방을 챙기곤 했다. 옷을 든든하게 입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늦가을에 검은 바지 위에 빨강과 검정 체크무늬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고 서울역 주위를 서성거렸다.

"네가 어른이 되면 아비를 이해할 거야."
아버지는 나의 아픔을 위로 한다며 선물을 안겨주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무척이나 다독거려 줬다. 물론 엄마에게도 곁에 누워 이야기 나누며 사랑을 절절하게 받았지만. 지금은 엄마의 아픔도 아버지의 불륜도 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이 인간은 나쁜 기억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잠재해 있나 보다.

터미널 지하에 있는 셰이크 섹, 지나가는 사람들을 잘 관찰할 수 있는 높은 의자에 앉았다. 햄버거를 꼭꼭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씹으며 내가 아이를 힘들게 했던 일들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집 나간다며 서울역을 헤매다 짓궂은 남학생에 쫓겨 우왕좌왕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은 바지에 빨강과 검은색 체크무늬 코트를 입은 내 모습이 귀엽다고 어쩌고저쩌고 주절거리던.

Friday, March 27, 2015

The railroad station

"Mom, I want to eat Shakeburger."

My son, who is in Japan, said that the Japanese food was too small in quantity to eat. After eating he is even hungry. Last time, he said he wanted to eat bagels.

"What can you do? I can’t send a hamburger, you just have to eat what you have there and adapt to it."

I have never sent a parcel of my life. It is my usual belief that one should solve a problem where one lives. It is annoying to think that buy things and send them to someone.

I told the son that way, but I feel aching. I went to Shake shack in Grand Central Station to try hamburgers instead of son.

It is a terminal where draws compassion deep inside in the heart. In the movie ‘Falling in love and Unfaithful’, the Grand Central Station is the background of the affair that fell in love. A train terminal is where the main characters fret and fidget to meet each other.

During my adolescence, I have suffered a lot of heartbreaks because of the mother who lay sick all her life, and as a result of my father's affair. "If father keeps afflicting my mother with affairs, I'll leave home" "Where are you going?" My father asked me, "I will go south along the railroad track." I was going to grab a bag while I was whimpering. In the late fall, I walked around a Seoul Station wearing a red and black checkered thick winter coat over black trousers.

"When you become an adult, you will understand me," my father said. My father comforted my pain, gave me gifts, talked and encouraged me a lot. Of course, I lying down beside my mom and talked and received love. Now, both the pain of a mother and the affair of a father are remembered as love, and it seems that humans have the latent ability to change the bad memory in a good direction.

Shake Shack in the basement of the terminal, I sat in a high chair to observe people passing by. I bite the hamburger slowly for a long time and think what the things that made my child harder. All of a sudden, I recalled being chased by a mischievous boy while walking around Seoul Station when I was adolescence. The mischievous boy went on to say and chased me that I was cute in my black pants and red and black-checkered coat.

Saturday, March 21, 2015

드디어 나도 뜨나 보다

드디어 나도 뜨나보다 했더니 뜨기는 웬걸!

지금부터 27년 전 만남이다. 그것도 교회에서. 우리의 인연을 연결해 준 교회가 아직도 존재한가? 아닌가? 구글에 두들겨 보니 찾을 수가 없다.

신도 25명 대부분이 집사로 목사님을 포함해 아르헨티나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퀸즈 플러싱에 있었던 교회였다. 나와 J 언니만이 집사가 아니라서 안 집사로 불렸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집사 안수를 받으라는 목사님의 제의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어쩌고저쩌고하다 언니와 나는 그 교회를 떠났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언니는 세탁소를 하다 지금은 은퇴했다. 세탁소 할 때는 바빠서 내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길레 내 블로그 주소를 e-메일 해줬다.

"읽는 내내 주변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잔잔하게 펼쳐지다 호탕하게 어느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로 이어지는 자기만의 치부나 자유로움을 방방곡곡으로 은근 가르침, 은근 비판 그리고 귀염성 있는 유모를 곁들인 글. ! 멋있다. 이수임." 
언니에게 e-메일을 받고서야 알았다. 어쩐지 갑자기 며칠 전부터 블로그를 읽는 숫자가 많아져 ! 드디어 나도 뜨나 보다.’며 신이 났는데 언니가 내 글을 계속 읽고 있는 줄이야.

처음 글을 시작하고 불안해하며 계속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 나보다 오래전부터 신문에 쓰고 있던 분이 
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 
하는 소리에 띵~하고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느낌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를 떴다
쓸데없이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신문에 왜 써? 고만 쓰지.”
뭐 문학인 협회에 속해있는 분의 쓰디쓴 또 다른 소리에 띵띵~ 벽에 부딪히고는 바닥에 쓰러지는 느낌, 수화기를 슬그머니 내려놨다.
글이 유치해.” 
좋아하는 친구의 말에는 띵띵띵~ 벽에 부딪히고 쓰러져 바닥을 헤매는 느낌으로 술이 확 깼다.  

감히 용기가 없어서 왜 내 글의 어떤 면이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그 사람들의 느낌이 그렇다는데야 어쩌겠는가. 취중이라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며 친구와는 잘 지내고 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모임에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미리 멀리서 보면 피한다. 그나마 간신히 쓰고 있는 글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잘 써 보려고 애쓰는 의지가 무너질까 두려워서다.

내 글을 읽고 격려해 주는 언니의 응원으로 이 글을 썼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나야말로 쓴소리엔 귀를 막고 칭찬에는 글을 써댄다. 나라고 누구처럼 구글에 나오는 뻔한 이야기 말고 장마철 눅눅한 사람 냄새가 배어있는 글을 쓰고 싶지 않을까?. 나도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고요.

Friday, March 20, 2015

I am far from becoming famous

27 years ago, I met J in a church. Does the church that connected us still exist? I cannot find it on Google.

The church was in Flushing, Queens, and most of the 25 worshipers were deacons from Argentina including the pastor. Only J and me are not deacons.

J and I left the church, avoiding the priest’s offer to be a deacon. But we have been in a good relationship until now. She retired from the laundry business. She was too busy when she was in the laundry business to read my articles properly. I e-mailed her my blog address to read.

I received her e-mail saying, “Throughout the reading your story, your articles have all kind of criticism, wits and appreciation of your own love and freedom which leads to a quiet panorama of your surroundings and at some point it ends up being unable to say anything. Wow! Cool.” Somehow the number of my bloggers has suddenly increased from a few days ago. I was exited. But the increase in number of reading my blog was due to her continuing reading. 

When I start writing the first time on newspaper I kept think about should I write with anxiety? Or not? At that time, a woman who was writing in the newspaper longer than me did say, "writing is not written like you white." I heard the sound of it, I feel like I hit my head against the wall and I could not say anything. "Why do you write your own story in the newspaper? Stop writing.” I heard a bitterly other voice of the person belonging to the literary society. I fell like I was falling on the floor. One of my most beloved friends got drunk and she said, "Your writing is childish." I fell like collapsed and the drink broke up with the feeling of wandering the floor.

I dare not have the courage to ask them, 'What's wrong with my writing?' I act like I did not hear because of being drunk and I am getting along well with my friend.
I avoid the other two from afar so as not to bump into each other at the meeting. I am afraid that I will lose my will to write well without giving up even the barely manage to write.

I wrote this article in support of J who reads and encourages my writing. The praise makes the whale dance, I myself shut my ears to bitter words and write for praise. Don’t I want to write an article something that smelly of a damp person in the rainy season other than the obvious story that comes out of Google?

Saturday, March 14, 2015

아쉬운 까닭은

다리 달달 떠는 발레가 뭐가 좋다고 갑자기 간다고 난리야. 나 원 참

한국장엘 가지 않아 김치 먹어 본 지가 꽤 됐다. 이렇게 춥고 눈 쌓인 겨울엔 묵은 김치찌개와 김, 송송 썬 파를 곁들인 명란젓을 얹은 따뜻한 흰 쌀밥이 먹고 싶다.

마침 남편이 차이나타운 근처에 갈 일이 생겨 김칫거리를 사려고 따라나섰다
눈도 펄펄 오고 이왕 나왔으니 우리 이스트 빌리지 근처 일식집에 갈까?” 
사시미에 따끈한 정종 좋지.” 
깔끔한 일식집에 앉아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칼칼한 목젖을 싸악 적시는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링컨센터 티켓이 생길 때마다 전화하는 친구가 발레 티켓이 있다며 만나자는 전화다. 김칫거리와 일식집은 다음에도 갈 수 있지만, 발레는 오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차 좀 돌려요.”

자고 나면 일주일이 후딱. 그리고 일 년이 후딱. 스치는 인연처럼 가던 세월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다 어느 해부턴가 번개 치듯 눈 깜박할 사이 사라진다. 누구 말마따나 60대에는 60마일 70대에는 70마일 속도로 시간이 간다할 일은 많은데 머리와 몸이 원하는 만큼 따라주지 않고 시간만 흘러가니 아쉬울 수밖에. 아침에 일어나 작업할라치면 어둑어둑 지는 해가 커튼을 치듯 창밖에 떡하니 와 있다. ‘오늘도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서운함에 오늘 해야 하는 일, 찾아온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상상하는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달달 떠는 환상적인 발레가 아니었다. 무대 밑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한눈에 보이는 가장 앞좌석이기도 했지만, 내 눈엔 의상 배경 율동이 현대 미술관에 들어서며 컨템퍼러리 미니멀 아트(단순함을 강조하는 현대 미술)를 감상하는 듯했다.

휴식 시간에 고개를 돌려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곱게 차려입고 나온 나이 든 사람들이 많다. 풍요로운 조상 덕에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 듯 예술에 조예가 깊어 종종 찾아다니며 보고 느끼는 그들의 문화생활이 부럽다.

미국에 살면서 아쉬운 것이 이민자들이 보는 수박 겉핥기식 미국문화가 아닌 그들 고유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은 욕심이 늘 마음 한구석에서 맴돌며 한국 남편과 살아 이들의 생활과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점이다. 그렇다고 30년 넘게 살아준 고마운 남편을 바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만약 남편의 배반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악다구니 쓰며 울고불고 난리 치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리라.

모국의 우리 세대에 유행한다는 억지 춘향 로맨티시스트처럼 외국인과 연애하며 그들의 문화와 생활을 배우고 느끼며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졌는데 Why not? 글쎄, 늙어서 될까 모르겠네.

Friday, March 13, 2015

For the reasons of regret

"Why are you suddenly going to see the ballet?"

It has been a while since I haven’t eaten kimchie because I didn’t go to the Korean market. In this cold and snowy winter, I want to eat Kimchi stew, seaweed and warm white rice with a pollack roe.

My husband just happened to go to Chinatown, so I followed him to buy something to make Kimchi. Snow is fluttering. “Shall we go to a Japanese restaurant near East Village?” "Let’s have Sashimi and warm sake.” Suddenly, the phone rang.

A friend calls me to meet me saying she have a ballet ticket at Lincoln Center. I can go to the Japanese restaurant next time, but I thought to see the ballet today.

Time flies like a bird flying in the sky. From any year, the time disappears like flashing light. As anyone says, time flies at 60 miles in 60s and 70s, it takes 70 miles per hour.

I have a lot of things to do, but my head and body do not follow as much as I want.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and work on it, soon the sun falls, and the darkness shines like a curtain. The day goes by in vain. I decided not to postpone today's work and opportunity.

It was not a fantastic ballet in a complicated, cumbersome white dress imagined by my husband. The costume, background and rhythm seemed to appreciate the contemporary minimal art of the museum.

During the break, I turned my head observed the movements of people. There are many older people dressed up nicely. Thanks to their rich ancestry, they seemed to be looking for and seeing often because they was proficient in art, which seemed to be part of everyday life. I envy their cultural life.

The fact that I am living in the US as an immigrant has not been able to experience the American culture naturally. It is because I live with Korean husband and did not learn the American culture properly. But it is ridiculous to change a thankful husband who has lived for over 30 years with me. If my husband 's betrayal gives me an opportunity, I will leave without hesitation.

I was given a chance to learn a new life by learning and feeling American culture and life in association with foreigners. Why not? Well, will it be possible with my age?

Saturday, March 7, 2015

아무래도 좋다

누가 보면 결벽증 환자라 할 정도로 수시로 쓸고 닦는다. 청소 자체가 단순 노동이다 보니 그림 그리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일까?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머리카락을 테이프에 붙이고 밥통에 묻은 때가 못마땅해 닦다가 옆에 놓인 토스터까지. 작업실로 쓰는 커다란 방은 자주 청소하지 않지만, 작업하다 나와서 깨끗한 공간에서 편히 쉬고 싶어서다.

날을 잡아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화장실, 내일은 싱크대 이렇게 부분적으로 시간 날 때마다 한다. 그러다 활동반경을 넓혀 아파트 건물 지하실 빨래터로 이불 빨래를 하러 원정도 간다.

하이,” 얼굴이 약간 검은, 퉁퉁한 여자가 반긴다. 나와 같은 이민 객인 듯하다. “너 몇 층 청소하니?” “? ~ 8. 너는?”. “5. 일주일에 몇 번? ” ! 감을 잡았다. 내가 아파트 청소하는 여자로 알고 있다는 것을. 화제를 바꾸려고 내 이름은 수, 너는?” “아멘다.”  

쓰레기를 아파트 문 앞에 하루에 3번 내놓으면 가져간다. 아파트 문을 열고 쓰레기를 버리려는데 가무잡잡하고 통통한 여자도 옆집 문을 동시에 열었다. “너 이 아파트 청소하니?” “.”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오는데. 너는?” “난 거의 매일 청소해. 반가워 내 이름은 수야.”

이 아파트 건물에는 대부분 백인이 산다. 그들은 아침에 일하러 나갔다 저녁에 온다. 나처럼 온종일 집 지키는 여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들뿐이다. 아침에 하얀 사람들이 출근하고 나면 나처럼 누런 사람들이 청소하거나 베이비시터 하려고 아파트로 출근하다. 일찍 온 사람들은 일 할 시간을 맞춰 엘리베이터를 타려는지 로비에서 서로 잡담하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는 듯하다.

백인도 아니고 민얼굴에 우아하게 생기지도 않은 게다가 거동이 불편하기는커녕 바삐 움직이는 내가 대낮에 집에 있으니 그들은 나를 청소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햇볕에 그을려 티베트 여자처럼 가무잡잡한 여자 동생이 백인과 결혼해 뒤늦게 딸아이를 낳았다. 딸이 다행히 잘 생긴 남편을 닮아 좋긴 한데 공원에 데리고 나가면 베이비시터냐? 고 물어본단다. 나는 청소하느냐? 고 물어보니. 가문의 내력인지. 나 원 참!

로비에서 지금 청소하는 여자들이 모여 회의하는 것 같은데 일자리라도 알아볼 겸 가보시지 않고.” 
빈정거리는 남편에게 
사실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청소긴 한데. 한번 가 볼까?"

일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하려고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찡하다. 길거리 좌판을 펼치고 고객을 부르는 이들 또한 남의 일이 아니듯 옛 생각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민 객의 초짜 시절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기에

Friday, March 6, 2015

Anyway it’s ok

I often sweep and wipe it so that someone can see me as a mysophobia. Cleaning itself is a simple labor. This is because I can relieve a lot of stress from making art works.

I attach the scatter hair on the floor to the tape and wipe out the dirt on the rice cooker and up to the toaster. I do not clean large rooms use the workspace but I want to relax in a clean space after work.  

Instead of day-to-day cleaning, I do it today at the bathroom and tomorrow at the sink whenever I have time. Then, I go to the basement laundry room of the condo to wash bedding.

"Hi," welcomed by a woman with a slightly black and fat. She seems to be an immigrant like myself. She asked me "what floor do you clean?" "Huh? 8th floor. How about you?" "The fifth floor. How many times a week?" I have a feeling that she knew I was a cleaning woman. To change the subject, "My name is Soo, are you?" "Amen."

I opened the door to put the garbage in front of the door. A plump woman opened the door next my door at the same time. "Are you cleaning this condo?" she asked me "Yes." "I come twice a week. How about you?" "I clean it almost every day. Nice me you."

Mostly white people inhabit this condo. They go out to work in the morning and came in the evening. The only ones who keep house all day like me are old people. After the white people go to work in the morning, yellow or brown people looks like me come to work to clean or babysit. Early comers seem to be chatting to each other in the lobby to make a time for work.

I am not white, nor graceful in the face and I am at home in broad daylight, far from being uncomfortable to move, so they must think of me as a cleaner. A sunburned my sister like a Tibet woman married a white man and later gave birth to a daughter. The daughter is fortunate to resemble a good-looking husband, but if my sister takes her to the park, “are you a babysitter?” People ask her. “Are you a cleaning lady?” People asked me. The history of the family goes in a strange direction. What a grief!

It makes me shudder to see the daily workers stamping their feet in the cold to get a job on the street. The peddlers who call customers also dimly think of my past life, as if it were not for others. I was not different from them when I was in the early days of immig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