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나의 애틋한 낭만의 시절을 대변해주는 단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장 친한 친구와 자주 드나들던
양장점 이름이다. 이대 다니는 그녀의 멋쟁이 언니가 주로 옷을 해 입던 곳이다.
우리도 패션 잡지를 뒤적이며 좋아하는 스타일을 찾아 맞춰 입고는 한껏 멋을 부리곤 했다.
막내인 친구는 위로 공부 잘하는 오빠와 언니들에게
듣고 보고 자라 성숙했다. 깔끔 반듯하고 무엇이든 거침없이
잘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함께 하다 홀연히 그녀가 결혼하고 아무 말도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훌쩍 떠난 그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불란서 파리로 향하려던
방향을 틀어 나도 미국행을 택했다.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찾으려는 듯 그녀를 미국에서 수소문하다 허탕 치고,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팔을 걷어붙이고 그녀의 과거 흔적을
찾아 나섰다.
친구가 살던 말죽거리를 헤맸지만, 예전엔 논밭뿐이었던 곳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찾을 수 없었다.
새싹이 푸릇푸릇 올라오던 논 둑길, 매미가 울던 울창한 나무 밑, 눈 쌓인 밭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걷던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태신앙인 친구가
다녔던 서대문에 있는 교회가 생각나 찾아갔다. 다른 곳도 아닌 뉴욕, 그것도 내가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아냈다.
교회를 찾아가 복도를 지나다 친구를 붕어빵처럼 찍어
놓은 아이를 봤다.
“네 엄마 이름이 뭐니?”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았다. 나는 어릴 적 친구 모습을 빼닮은 아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와이프는 사람들을 초대하느라 집에서 준비하고
있어요 함께 가요”.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커다란 집 수영장 주변에 초대받은 우아한 사람들이
모여 담소하는 와중에 갑자기 나타나 바쁜 친구를 붙들고 나는 꺼억꺼억 울었다. 지금 와 생각해도 난 참 철없는 인간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형님 내외와 아이 셋을 거덜
거리는 차에 태우고 가서.
살기 어려운 그 당시 내 모습은 무척 초췌했다. 차를 타고 헤어지는 나에게 잘 가라며 손짓하던 친구의 얼굴엔 연민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남들은 살기 어려울 땐 조용히 숨어 살다 살만하면 친구도 찾는다는데 뭐가 그리도 급했단 말인가!
동창회의 간부이기도 한, 이 친구에게서 모임에 나오라고 연락이 왔다. 신이 났다. 그러나 또다시 그녀를 힘들게 할 줄이야. 회비를 준비하지 않아 내 몫을 내 줬으니. 다음 동창회에 가서 꾼 회비를 돌려주려 했지만,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내용인즉슨
"대부분 동창이 잘살아. 특히 롱아일랜드의 엄청 성공한 동창 집에서 다음 모임을 하는데, 잘 사는 것을 보고 내가 상처받을
것이 걱정돼. 오지 않는 것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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