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에 도착해 호텔을 찾아가는 길, 저 멀리 바닷가에 로맨틱한 식당들이 눈에 띄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식당을 찾아 바닷가 쪽으로 꺾어 걸었다. 번화가에 그 많던 상가들이 멀어지며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져 바닷가로 이어졌다. 분비던 관광객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후미진 골목에 다다랐다.
염원의 도시 이스탄불에 취해서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것을 감지 못했다. 걸어오며 서너 번을 반복해서 스친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맞닥뜨린 형국에서야 직감했다. 쿠르드족 십 대 서너 명이 나를 점점 좁혀 다가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동시에 가방끈이 낚아채였다. 몸이 뒤로 획 당겨지더니 왼쪽으로 돌았다. 굵고 검은 손이 가방을 움켜쥐자 앞으로 힘차게 당겼다. 반사적으로 나도 가방끈을 움켜잡았으나 낚아챈 십 대의 힘에 못 이겨 앞으로 쓰러졌다.
놓치지 않으려는 가방끈을 당기느라 남자는 코블 돌 바닥 위에 엎어진 나를 줄이 끊어질 때까지 끌어당겼고 나는 끌려갔다. 한순간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왜 그리 오랫동안 끌려갔다고 기억되는지. 주위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 드디어 가방끈은 끊어졌다. 남자는 엎어진 나를 승리자의 얼굴로 힐끗 뒤 돌아 비웃으며 멀리 사라졌다.
달아나는 그들을 보며 벌떡 일어서려는데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는 골목 한가운데에 망연히 엎어져 있었다.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나를 흘금 흘끔 보며 슬슬 흩어졌다. 흩어져가는 모든 사람이 한통속으로만 여겨져 분노가 끓어올랐다.
충격에서 깨어나니 무릎에 통증이 느껴졌다. 무릎은 찢어져 피가 나고, 몸은 움직일 수 없이 쑤셨다. 몸 전체가 퍼렇게 멍이 들었고 바지가 들어가지 않을 만큼 하체가 부었다. 다리를 굽힐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일월 초, 일주일간의 연휴에 들어선 이스탄불은 몹시 추웠다. 길바닥엔 집집이 양을 잡고 버린 핏물이 여기저기 흘러내렸다. 그 피비린내가 더욱 나를 어떤 야만성에 진저리치게 했다. 터키를 거쳐 그리스로 가려던 여행 계획도 지지부진했다. 일주일 후에 관공서 문이 열려 여권을 만들 때까지 터키에 갇혀 있어야 했다.
호텔 창틀에 베개를 괴고 내려다봤다. 새 옷을 입은 사람들은 디저트 ‘바클라바’ 상자를 들고 어디론가 바삐 갔다가는 돌아오는 행복한 모습들이다. 새벽 6시만 되면 온 도시를 울리는 이슬람교의 예불 소리는 내 귀에는 분노의 절규 소리로 선잠을 깨우곤 했다.
TV를 틀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니 ‘해신’이란 한국 드라마가 나왔다. 침대에 누워 해신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파리에서 뉴욕에 여행 온 한 친구가 생각났다.
여행은 안 하고 드라마 ‘다모’를 끝 편까지 보고 떠난 그를 보고 ‘한심한 친구’라며 속으로 생각했는데, 나야말로 한심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