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5, 2008

광장동(Grand Street)의 추억


찬 바람이 불면 공연히 옛 생각이 난다. 

오래전 맨해튼 차이나타운 그랜드스트릿에 있는 7층 건물 2층에 살았다. 아침에 위층 바느질 공장으로 올라가는 낡고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 소리에 잠을 깬다. 2층을 지날 때 요란했던 소리는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물속에 잠기듯 사라진다. 

저녁엔 또다시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는 점점 요란해지면서 우리 층을 지날 때는 마치 폭풍이 스쳐 지나가듯 한다. 그러면 나도 저녁 찬거리를 사러 차이나타운으로 나갔다.

내가 차이나타운으로 이사 오기 전 우리 부부는 시청에서 결혼선서만 하고 떨어져 살았다. 남편은 그의 룸메이트와 맨해튼에서, 나도 룸메이트와 퀸스에서 살았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함께 살 곳이 없는 우리 화가 부부는 이전에 살던 대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6개월쯤 지난 후 남편의 룸메이트가 그랜드스트릿에서 셋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천장이 높은 커다란 작업실의 한쪽은 룸메이트가 다른 한쪽은 우리 부부가 썼다. 각자 공간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침실이 있었다.  우리 침실 구석에는 이전에 살다 나간 사람이 두고 간 드럼, 북 등 타악기들이 쌓여 있었다. 악기들과 함께 누워 있노라면 곡마단 원으로 떠돌다 피곤해서 천막 안에서 쉬고 있는 곡예사 같았다. 

겨울엔 히팅이 없었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추웠다. 건물은 낡아서 쥐와 벌레가 많았다. 항상 몸의 여기저기를 긁다가 잠이 들곤 했다. 남편은 긁어대는 내가 안쓰러운지 흰 종이를 깔고 천장을 두드려서 벌레를 떨어뜨려 잡아주곤 했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데 오다가다 들르는 친구들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스튜디오 한가운데에 있는 때에 찌든 커다란 회색 소파에서 자고 놀며 들락거렸다. 금요일부터 놀기 시작해 일요일 저녁에나 돌아갔다. 우리 스튜디오를 ‘광장교회’(Grand Street에 있다고) 라고 불렀다.  남편은 ‘이 목사’ 그리고 우리 룸메이트는 ‘황 장로’라 불렸다.
 
연말에는 아예 우리 스튜디오로 퇴근하고 출근하며 며칠씩 놀았다. 황 장로는 동문회 송년회에서 먹다 남은 컴파운드 플라스틱 버킷에 양념 불고기를 가득 들고 왔다. 거기에 김치 한 병만 있으면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더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것도 힘든 줄 몰랐다.
 
건물 주인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콩나물 공장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집세를 내러 지하실에 가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 불러야 나타났다. “어둡지 않니?” “밝으면 콩나물이 빨리 자라서 곤란하다”며 집세를 받고는 콩나물 한 움큼을 싸줬다.

집세를 내고 나면 돈이 없어 콩나물국, 무침 그리고 콩나물밥에 파묻혀서도 작업을 고집하며 버텼다. 그러다 매년 올라가는 집세를 감당하기 힘들어 광장동을 떠나야 했다. 우리 부부는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브루클린 그린포인트(한국 이름은 녹점동)로 우리 룸메이트는 서울로 떠났다.

찬 바람이 불면 그 친구들이 몹시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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