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3, 2008

화가로 산다는 것은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맨해튼 애비뉴 북쪽 끝, 뉴타운 강가 한 층에 400평이 넘는 5층짜리 큰 공장 건물이 있다

맨해튼 소호에 살던 우리 부부는 매년 올라가는 렌트비 감당이 어려워 1984년 집세가 싼 이 건물로 이주했다. 건물 주인이 창문 두 개씩 들어가도록 30평 정도 크기로 5층 창고 바닥에 분필로 금을 그어 줬다. 화가들은 자신이 좋은 스페이스를 골라 그 금 위에 벽을 세워 작업과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렌트 계약 조건이다.

대부분 화가가 바닥이 고르고, 천장이 깨끗한 스페이스를 골랐다. 그러나 남편은 층 입구 공동 화장실 가까이 있는 천장과 바닥이 엉망인 곳을 쓰겠다고 계약했다. 세입자들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지만, 우리는 가까이 있는 공동화장실로 파이프를 연결해 우리만의 화장실과 샤워실을 가질 수 있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보이는 맨해튼 야경은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하룻밤의 꿈으로 끝날 일이 우리를 기다릴 줄이야! 아침에 일어난 남편 얼굴은 더러운 샛강에서 우글거리는 모기떼에 뜯겨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 이렇게 우리의 신혼 첫 여름은 모기떼와 싸우며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겨울은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크고 오래된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강풍은 히팅 없는 우리 공간을 냉동실로 만들었다. 차라리 모기떼가 그리웠다. 공간 한 귀퉁이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전기 곤로를 놓고 낭만적이라며 좋아했던 창밖을 멀리한 채 떨면서 지냈다.

집에 있는 두터운 옷이란 옷은 모두 끼어 입고 있다가 밖에 나가면 오히려 밖은 뜻했다왜 홈리스들이 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몸만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도 추웠다따뜻한 봄이 와도 여전히 그 두꺼운 겨울옷을 벗지 못했. 

여러 해를 냉장고 같은 건물에서 살다 보니 따뜻한 곳에 들어가면 더워서 힘들 정도로 차가운 곳에 잘 적응하는 몸 구조를 갖게 되었다한 층이 보통 건물 두 층 정도로 천장이 높은, 엘리베이터를 쓸 수 없는 이 건물에서 나는 임신을 했다. 배가 부른 나를 남편이 위에서 끌어 올리고, 뒤에서 받쳐주며 살았다.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아직도 렌트가 싼 그 건물에서 살고 있지 않았을까?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스승의 채찍과도 같았다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생겼는지 우리는 아이를 위해 새로운 곳을 향해 힘껏 날갯짓하며 높이 날았다.

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인지도 모른다
'그림 그리기 위한 시간 때문에 돈 벌 시간이 없다. 돈도 벌지도 못하면서 큰 공간에서 작업해야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며 버텨야 하는 것이 화가들의 삶이다. 그렇게 몇십 년을 버티고서도 대부분 화가가 보상 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붓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약을 끊지 못하는 이유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도 우리 부부는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작업하고 있다옛 시절의 슬펐던 기억과 지금의 행복이 교차하는 묘한 기분에 눈시울을 적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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